사람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구분짓는다는 것이 어페가 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구분이 불가피 할 때가 있다.
특히 의식레벨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편의상 의식레벨의 구분을 짓기에는 수평적인 개념이 아닌 수직적인 개념으로 나눠야 이해가 빠르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개념을 두어 이해를 돋우기도 한다.
여기서 상근기는 깨달음에 도달한 의식레벨을 의미하는 것이며, 나머지 중근기와 하근기는 상근기로 가기 위한 단계, 즉 하근기에서 중근기로 중근기에서 상근기로 이르게 하는 것을 공부라고 한다.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보편적인 공부의 정도가 하근기를 벗어나는 공부가 최선이다. 보다 좀더 잘 먹고 잘 사는데 필요한 정보 습득 정도…
현대 사회의 분위기가 그러하니 학자들은 주로 중근기 공부자들로서 상근기로 발전시켜 도달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것은 중근기 공부로도 충분히 누리고 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은 천지만물의 영장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분수를 지켜야 함이 옳은 것이다. 그 분수라는 것이 천지만물의 깨달음 공부에 있다. 깨달음 운운한다고 하여 종교로 취부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것은 종교 이전의 것으로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취해야 할 마음자세이고 행동 방식인 것이다. 즉 거발한 한웅천왕께서 개천으로 나라를 세우신 목적과 상통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부자세를 학교나 기타 사회시스템에서 이끌어 방향을 잡도록 해야 함이 옳은 것이다. 특히 종교가 탄생된 목적이 이러한 개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신분제도가 만연했던 유교사회인 이씨조선에서도 글을 가르치는데 처음 글이 하늘이고 땅이었다. 하늘 천, 땅 지…
문자를 가르치면서 하늘을 알게하고 땅을 알게하였는데, 오늘날 교육방식은 앵무새도 가르치면 하는 그냥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 불과할 뿐,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말의 뜻과 속성은 가르치지 못하고 넘어간다.
그러니 천지만물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자존감은 인지하지 못하고, 삶을 사는 영혼없는 인간기계가 되어, 살다가 싸우다가 병들면 죽기 싫어 아둥바둥하다가, 결국 죽게되는 것…그것 이상도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사람의 의식성장을 위해 가르침의 시스템이 시도된 기록들은 차고넘치게 많은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태시기太始紀에 따르면
又使神誌氏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跡)[踪].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 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 而太古文字泯沒不存, 抑亦其組成也, 猶有不完而然歟. 嘗聞, 六鎭之地及先春以外岩石之間, 時或發見雕刻文字, 非梵非篆, 人莫能曉, 豈神誌氏所作古字歟0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 태고 문자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문자가 아닌가 한다.
神市氏御世愈遠, 而蚩尤 高矢 神誌 朱因諸氏, 幷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 父子 君臣 衣服 飮食 宮室 編髮 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而政敎禮儀逐漸稍備, 初之于于草衣木食者, 始入人道之倫矣. 嗚呼偉哉!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더욱 오래되니, 치우·고시·신지·주인씨 등이 모두 같이 사람간의 삼백예순여섯 가지 일을 다스려, 남녀와 부자 및 군신간의 일이며 의복과 음식 및 궁실의 일은 물론,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에 관한 법도를 차례차례 풍속으로 이뤄가게하였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교화에 물들어 갔다.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치고 다스림과 가르침이며 예절과 의례 등도 점차 따라서 조금씩 갖추어져 가니, 처음에는 아는 바가 없이 제 멋대로 날뛰며 풀로서 몸을 가리고 나무 열매를 먹던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된 도리로서의 윤리에 접어들게 되었다. 오호라 그 위대함이여!
규원사화의 태시기에 언급된 신시씨는 거발한 한웅천왕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번에는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삼성기전 상편 三聖記全 上篇와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 언급된 기록이다.
竊想三神生天造物桓仁敎人立義自是子孫相傳玄0得道光明理世旣有天地人三極大圓一之爲庶物原義則天下九桓之禮樂豈不在於三神古祭之俗乎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하늘에 태어나시사 물건을 만드시고, 한인은 사람을 가르치어 의를 세우시니 이로부터 자손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현묘한 가운데 도를 얻으시고 광명한 가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니라. 이미 천(天), 지(地), 인(人) 삼극(三極)은 있었고, 대원일(大圓一)은 이것이 만물의 원리가 되었으니 곧 천하 구한(九桓))의 예악(禮樂)이 어찌 삼신고제(三神古帝)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蘇塗之側必立0堂使未婚子弟講習事物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0術釗六藝之類也
소도(蘇塗)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
然庶物各有數而數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理而理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力而力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無窮而無窮未必盡厥庶物也住世爲生歸天爲死死也者永久生命之根本也故有死必有生有生必有名有名必有言有言必有行也
그런데 사물은 모두 사물<庶物>의 수(數)를 가졌으나 수(數)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이치<理>를 가졌으나 이치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힘<力>을 가졌으나 힘<力>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무궁함이 있으나. 무궁함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나니, 세상에 있으면 산다 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었다 하는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라.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이 있느니라.
心氣身爲三房房爲成化之根源氣不離心心不離氣身在其中
심(心),기(氣),신(身)을 삼방(三房)이라 하고 성화(成化)의 근원이라 한다. 기(氣)는 심(心)을 떠나지 않으며, 심(心)은 기(氣)를 떠나지 않나니, 신(身)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性爲眞理之元關心爲眞神之玄房感爲眞應之0門究理自性眞機大發存神求心眞身大現化應相感眞業大成
성(性)을 진리(眞理)의 원관(元關)이라 하고, 심(心)은 진신(眞神)의 현방(玄房)으로 하고, 감(感)을 진응(眞應)의 묘문(妙門)으로 한다. 이를 탐구하고 성(性)에 의해 진기(眞機)를 크게 발하나니, 신(身)을 분명히 하고 심(心)을 구한다면 진신(眞神)은 크게 나타나 화응하여 서로 감응하고 진업(眞業)을 크게 이룰 것이니라.
所驗有時所境有空人在其間庶物之有虛粗同體者惟一氣而己惟三神而己有不可窮之數有不可避之理有不可抗之力有或善不善報諸永劫有或善不善報諸自然有或善不善報諸子孫
조짐에는 때가 있고 만남에는 장소가 있으나 사람은 빔(虛)과 참(粗)이 사이에 있느니라. 만물은 이에 있는 바, 동체인 것은 일기(一氣)뿐으로, 다만 삼신(三神)뿐이니라. 추궁치 말아야 할 이치가 있고 피하지 말아야 할 도리가 있으며, 거스르지 말아야 할 기능이 있나니, 혹은 선(善), 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영겁에 보답하고 혹은 선(善), 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자연에 보답하고, 혹은 선(善) 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자손에 보답하느니라.
經云人物同受三眞惟衆迷地三妄着根眞妄對作三途父道法天眞一无僞師道法地勸一无怠君道法人協一无違
경(經)에서 말한다.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三眞)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리고, 진(眞)과 망(妄)이 어울려 삼도(三途)를 이룬다. 어버이의 도는 하늘을 모범 삼나니 참됨으로써 하나같이 거짓 없고, 스승의 도는 땅을 모범으로 하나니 부지런함으로써 하나같이 게으르지 않으며, 다스림의 도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나니 협력함으로써 하나같이 어김이 없도다.」
故桓仁氏承一變爲七二變爲六之運專用父道而注天下天下化之神市氏承天一生水地二生火之位專用師道而率天下天下0之王儉氏承徑一周三徑一0四之機專用王道而治天下天下從之
한인씨(桓因氏)는 한 번 변화하여 칠(七)이 되며, 두 번 변하여 육(六)이 되는 운을 받아 오로지 어버이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에 쏟으매, 천하가 이에 교화된다. 신시씨(神市氏)는 천일(天一)의 생수(生水)와 지이(地二)의 생화(生火)의 자리를 계승하여 오로지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하매, 천하가 이에서 배운다. 왕검씨(王儉氏)는 지름이 둘레를 한바퀴 도는 길이인 3,14의 기(機)를 받아 오로지 왕의 도를 써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한다.
그 외 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몇가지 부분만 언급하여 보았다.
특히 위에 언급된 내용들 중에는 삼일신고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들도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인간366사는 우리가 의식성장을 위해서는 필히 공부하여 할 세상 이치인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같이 문화의 발전으로 공부 전문기관인 학교가 생겨나고 대다수의 사람이 학교를 통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질 보다는 양에 입각된 공부이다보니, 구멍 뚫린 공부로 인간 공부를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말해 지식과 방편을 쌓는데 집중된 공부하는 공장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학교 공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여지껏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종교다. 종교가 생겨난 본 목적이 뿌리 공부를 위해 만들어진 교육시스템인것을 감안하여 보면, 인간으로서 터득해야 할 필수요건적 교육이기에 오늘날 까지 종교가 존재해 올 수 있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닌것이다.
그러한 시각으로 오늘날 종교를 공부의 단계로 구분지어 본다면, 불교의 처음 취지는 하근기에서 부터 단계를 밟아 상근기까지 도달하려는 공부체계로 보는것이 맞을 것이고, 기독교는 주로 하느님 말씀을 위주로한 중근기 공부체계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각 종교마다 생겨난 색깔에만 충실하여도 역할이 될 수 있는 시스템임에도 불가하고,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고 본질을 일깨우는 목적으로 생겨난 종교이지만, 수천년을 이어오면서 생겨난 기본 목적이 많은 퇴색과 왜곡으로 그마저도 본질의 공부는 하지않고 있음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마다 공부의 방식과 체율체득의 정도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바가 다르겠지만, 기본적인 천지의 이치가 공부의 바탕에 깔려야 방법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인데, 오늘날 공부는 그 기본적인 이치 조차 전무후무하니 헛껍데기들의 보편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의식레벨에 있어 "나"를 알아가는 단계는 시작 단계라 볼 수 있다. 나를 형성하는 모든 연관성을 끌어안고 이해를 하고 풀어가는 과정, 즉 나를 세상 만물에 대입하는 과정이 필수과정이다.
소위말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여의고 넘어가는 과정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입되는 개념이 부모이고, 조상이고 최종적으로는 부처가 될 것이고 하느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한 공부의 기초 단계인 내 처음 시작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제일 많은 걸림돌이 되는 것이 오늘날의 종교다. 오늘날의 종교가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는 첫번째 원인이 바로 천부경, 삼일신고, 인간366사와 같은 원리를 전파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 민족의 홍익사상과는 완전히 위배되는 정신문화이고, 우리 민족이 꽤하는 의식세계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홍익인간의 주체인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나와 너라는 의식체계가 형성되는 것이기에 내 조상의 정신적 가치관을 모르고서는 나를 알 수가 없는 것이고, 나를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상근기를 지향할 수 있는 삶이란 바로 홍익인간이기를 자부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을 통하여 도달되는 최종 의식레벨이 상근기가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나를 위하는 삶, 내 자식을 위하는 삶, 나아가 세상을 위하는 삶은 홍익인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홍익인간의 삶은 모든 삶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향되고 바탕이 되는 종교와 세상이야말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사안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의식레벨을 높이는 키워드는 바로 "홍익인간"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황궁씨가 마고성을 출성하며 마고 앞에 맹세한 "복본의 맹세"를 되짚어보면서, 과연 우리가 지금 이 싯점에서 취해야 할 바가 무엇이겠는가를 심도있게 생각하고 나아가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
홍익인간 + 홍익가정 + 홍익사회 = 이화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