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백공 종사님의 삼일신고 (한밝뫼 제139호에 실린 내용)
-1994년 부산 전포동 배달학당에서 하신 강의를 녹취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기본적으로, 마음을 통해서는 계속 공부하면서 선한 일을 하고 기운을 통해서는 항시 맑은 기운을 갖도록 노력하고 몸뚱이를 통해서는 귀하게 보이는 여러 가지 몸가짐을 갖추라는 거예요.
그러려면 자기 스스로 이 열여덟 경계만 잘 다스리면 되는 거예요. 이제 삼일신고 강의가 다음 주 마지막 한번이 남았는데 그럼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떻게 공부를 해야만 깨침의 길로 바르게 갈 수 있는가 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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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삼일신고 여덟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마치기 전에 조식법이라는 수행법을 한 30분 정도 하겠습니다.
중 선악 청탁 후박 상잡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 청탁과 후박을 상잡하여.
선악과 청탁, 후박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조, 즉 마음과 기와 육체를 통해서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마음을 통해서 느껴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선과 악. 악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다음에 기. 기와 호흡을 조절해서 맑은 기운을 늘 갖고 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흐린 기운을 갖고 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다음에 육체. 몸뚱이를 가지고 가장 기본적인 여섯 가지의 그 뿌리를 마음대로 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적당하게 잘 조절해서 굴리는 사람이 있어요.
상잡이라는 것은 결국 그 행위들이 서로 섞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마다 전부 다 섞여있는 거예요. 선악과 청탁, 후박.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여섯 가지로 달리는 길은 각자 그냥 계속 섞이고 있는 거예요.
마음 따로 있고, 기에 의해서 나타나는 기운 따로 있고, 몸뚱이에 접해서 나타나는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세 가지가 항시 서로 같이 뒤섞여가지고서, 그걸 상잡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경도임주
여기서 경(境)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강의 때 아마 얘기했을 거예요. 열여덟 경계, 그게 경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희구애노탐염(喜懼哀怒貪厭), 기운을 통해서 느껴지는 분란한열진습(芬寒熱震濕), 그 다음에 육체, 즉 몸뚱이를 통해서 부딪히는 경계가 성색추미음저(聲色臭味淫抵).
마음과 몸과 기운을 통해서 접촉하고 느껴지는 그 경계, 열여덟 경계를 여기서 그냥 한마디로 경(境)이라고 그랬어요.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 이 열여덟 경계를 생각나고 느껴지고 접촉되는 대로, 마음대로 달리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행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너무 함부로 한다는 거예요.
타생장소병몰 고
그렇게 할 때 결국 타생장소병몰 고(墮生長肖病歿 苦).
불교에서는 보통 생로병사, 이렇게 얘기하지요? 생로병사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모든 하나의 고(苦)입니다. 여기선 하나를 더 붙였네요. 생장소병몰 고(生長肖病歿 苦)..
생(生)이라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는 거고, 장(長)이라는 것은 성숙하는 것, 그 다음에 소(肖)라는 것은 늙는 거예요. 병(病), 병들고 그 다음에 몰(歿), 죽는 것..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병도 들고 언젠가는 결국 죽는 것.
그러다 결국 떨어지는 거예요.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그 과정을 통해서 떨어지는게 있고 올라가는게 있는데, 떨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구실을 다 하지 못한 상태에서 떨어지는 거고 올라간다는 것은 인간의 구실을 다 한 상태에서 하늘과 함께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표현적인 방법이 떨어지고 올라가는 것이지, 사실 떨어지고 올라가는 것은 없는 거예요. 제 구실 못하면 결국 떨어지는 것이고 제 구실 다할 때는 올라가는 것이고..
결국 그 모든 괴로움에 떨어지는 거예요. 왜? 열여덟 경계를 자기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 끄달리다 보면 결국 괴로움에 떨어지는데, 그 괴로움의 상태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지 어디 지옥이라고 하는 곳이 따로 있는게 아니에요. 당연히 지옥이 따로 없으니 천당도 따로 없고 허공 속의 극락도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너무너 뻔한 것 아니겠어요? '나'라고 하는 개체 속의 착각에서 벗어나버리면 '나'의 전생이니, 내생이니 하는 헛소리 같은 얘기는 하지 않을 것이고 흘러가버린 과거의 장면들을 생각하며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지레짐작하는 망상에 사로잡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오직 '바로 지금'뿐입니다.
'바로'는 찰나이며 '지금'은 시간과 공간이 하나인 때를 말해요. '바로 지금' 최선을 다하면서 실제 처럼 생생하게 연기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