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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서 동이전 기록의 평가 및 연대기 4] 자치통감 당기 신라/구오대사 ...
  
 작성자 : 참한역사신…
작성일 : 2020-10-26     조회 :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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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근 

40여년 족보·역사 연구

[저서]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홍익인간 7만년 역사/천부경 인간완성-제1부 천부경과 음양오행 ·역원리 이해 등 

<고조선 문자> 검증역 · 허대동 저. 이민화 감수 / 공학사·법학사·언론학사·인문학사(중문학·영문학·국문학)

해달별문화원 · 천부역사태학원 대표 / 민족회의 상임부대표 /  민족회의 역사광복군 총사령 / 기천검학 범사 / 참한역사신문협의회 감사 / 한뿌리사랑세계모임 자문위원 / 도선풍수지리신문 편집인 / 법무사

중국사서 동이전(東夷傳) 기록의 소평(小評)과 연대기 정리 

<삼한(三韓)·신라(新羅)>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서(晉書), 양서(梁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남사(南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실린 동이전(東夷傳),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우선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 弁辰)의 삼한(三韓)과 신라(新羅)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여 그 사건별 기록의 정확성 여부와 가치를 간략히 평가하고,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로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일부 역사연구가들이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아주 정확하다고 믿거나, 우리 측 사서에는 없는 기록을 싣고 있는 것처럼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을 법 한데, 혹시라도 이러한 맹신적 사례를 우려하여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역사 사실적으로 과연 정확한 것인지, 주요 기사들의 사건이 과연 어느 시기에 있었던 것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원문은 생략하기로 한다.


중국사서 동이전 기록의 평가 및 연대기

자치통감 당기 신라(資治通鑑 唐紀 新羅) 

(1) 자치통감 기록 개요

자치통감은 중국 북송대의 정치가 사마광이 주체가 되어 편찬한 통지(通志)라는 편년체 역사서로 서기1065년부터 서기1084년까지 약 20년간 작업하였는데, 송신종이 사마광을 치하하며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총 294권으로 주기(周紀) 5권, 진기(秦紀) 3권, 한기(漢紀) 60권, 위기(魏紀) 10권, 진기(晉紀) 40권, 송기(宋紀) 16권, 제기(齊紀) 10권, 양기(梁紀) 22권, 진기(陳紀) 10권, 수기(隋紀) 8권, 당기(唐紀) 81권, 후량기(後梁紀) 6권, 후당기(後唐紀) 8권, 후진기(後晉紀) 6권, 후한기(後漢紀) 4권, 후주기(後周紀) 5권, 부록(附錄) 1권이다.  


(2) 기록의 평가

북사(北史)의 기록을 요약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별다른 자세한 내용이 없어 참조할 것이 없다. 


구오대사 외국열전 신라(舊五代史 外國列傳 新羅) 

(1) 구오대사(舊五代史) 기록 개요 

구오대사(舊五代史)는 중국 북송 시대에 설거정 등이 태종의 명에 의해 편찬한 역사서로  후량 개평 원년(서기907년)부터 후주 세종 현덕 7년(서기960년)까지 기록하고 있는 중국 정사 이십사사 중 하나이다. 양당진한주서(梁唐晉漢周書)라고도 한다. 원제는 오대사(五代史)이나, 훗날 구양수 등이 오대사의 내용이 실제와 다른 것이 많다 하여 새로이 신오대사를 편찬하였는데, 현존하는 구오대사는 청나라 때의 학자인 소진함(邵晋涵) 등이 영락대전등에서 원본 구오대사를 인용하고 있는 부분을 모아서 재정리한 것으로, 이때부터 '구(舊)' 라는 글자를 앞에 덧붙여 신오대사와 구분하였다. 본기 61권, 열전 77권, 지 12권 등 총 150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 양서가 24권, 당서가 50권, 진서가 24권, 한서가 11권, 주서가 22권이다. 중국의 정사 중 '외국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구오대사》이다. 


(2)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열전 신라

신라는 그 나라의 풍속에 중구일에는 서로 경하하며, 해마다 이 달에는 일신과 월신에게 절을 한다.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 비단과 구슬로 장식하는데, 머리털은 대단히 숱이 많고 검으면서 아름다웠다. 


(3) 기록의 평가 
극히 일부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을 뿐으로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다.


신오대사 사이부록 신라(新五代史 四夷附錄 新羅) 

(1) 신오대사(新五代史) 기록 개요 

신오대사(新五代史)는 북송의 구양수가 구오대사에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여 황우 5년(서기1053년)에 완성한 중국의 오대십국 시대를 다룬 역사서이다. 개인이 지은 정사로 이십사사의 하나이다. 신오대사의 원래 이름은 오대사기이지만 구오대사와 구별하기 위해 신오대사로 부른다. 본기 12권, 열전 45권, 고 3건, 세가 10권, 연보 1권, 부록 3권으로 총 7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가와 연보는 남쪽의 10국에 관한 것이다. 중국의 정사(正史)에서 세가가 쓰인 예는 사기와 신오대사(新五代史)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2) 신오대사(新五代史) 사이부록 신라

신라는 변한의 후예들이다. 그 나라의 지리, 군장의 세계, 물산·풍속 등은 『당서』에서 볼 수 있다. 그 [나라의] 대족으로는 김씨·박씨가 있는데, 당 고조 때 김진(金眞)을 봉하여 낙랑군왕으로 삼았으며 그 후부터는 그 후손을 항상 임금으로 삼았다.

동광(同光) 원년(서기923년; 新羅 景明王 7년) 에 신라국왕 김박영이 (후당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장흥(長興) 4년(서기933년; 新羅 敬順王 7년)에는 권지국사 김부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왔다. 

박영(朴英)과 부(溥)의 세차와 즉위년·졸년 등에 관한 것은 사관이 모두 그 기록을 빠뜨렸다. 후진(晉:936~946) 이후부터는 (신라의 사신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3) 기록의 평가

신라가 변한의 후예들이라는 명백한 오기를 하고 있으며, 당서에 기록된 사건 이후의 후당(後唐)과 신라(新羅)와의 사건을 적고 있으나 사신을 보내고 조공하였다는 것 외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4) 사건별 연대기

서기923년 동광(同光) 원년(新羅 景明王 7년) 에 신라국왕 김박영이 (후당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서기933년 장흥(長興) 4년(新羅 敬順王 7년)에는 권지국사 김부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왔다.  

서기936년 후진(晉:936~946) 이후부터는 신라의 사신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여기서 후진은 당(唐:618~907) 멸망 이후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오대 중 세 번째 나라이며, 신라는 서기935년에 고려(高麗)에 항복하였으므로 당연한 기록이 된다. 


중국사서 동이전 삼한·신라 기록의 연대기 정리·보완

이상의 중국사서 동이전 삼한 및 신라의 기록에 있는 주요사건과 관련된 연대기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서기전1120년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망명하였다<한단고기 태백일사 번한세가 참조>. 서기전1122년에 주무왕이 은을 멸하였는데 은나라 자작이던 기자가 패잔병 5000을 이끌고 북상하여 단군조선 영역이던 태항산의 서쪽 지역으로 가서 정착하였던 것이 된다. 그런데 이를 두고 중국사서에서는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고 일방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기자가 단군조선 전체를 다스린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는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아니하며, 이후 기자는 단군조선의 제후인 기후(箕侯)로서 기록되게 되고 실제 기자는 사사(士師)이던 왕수긍(王受兢)에게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단목판(檀木版)에 은문(殷文)으로 새겨달라고 하여 읽었다라고 전한다<대진국 제3대 문황제의 삼일신고봉장기 참조>. 

서기전650년경 연제(燕齊)의 공격으로 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과 기후국(箕侯國)의 지배층은 동쪽으로 이주하여 번한(番韓) 지역에 정착한 것이 되고, 기후국 시조 자서여(子胥餘)의 차자(次子)는 선우씨(鮮于氏)가 되었고 후대에 남하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조(趙)와 연(燕) 사이에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을 세웠다가 조나라 무령왕에게 망하였다. 나라를 잃고 번한 지역으로 이주한 기후(箕侯) 자서여의 장자 집안은 읍차(邑借)의 직을 지낸 것으로 되고 서기전323년에 기자의 먼 후손인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번조선왕이 되었다. 

서기전323년 1월 기자의 먼 후손인 읍차 기후(箕詡)가 번한(番韓) 수한(水韓)이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번한성(番汗城)에 입궁하여 연(燕)나라를 대비하여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칭하며 사후 윤허를 구하였다<한단고기 북부여기 및 태백일사 번한세가 참조>. 연나라를 역공하려 하자 대부(大夫) 례(禮)가 간하여 멈추었다. 대부 례로 하여금 연(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단군조선의 삼한(三韓)이 삼조선(三朝鮮)으로서 번조선왕, 마조선왕이라 칭한 시기는 서기전425년부터이다. 

서기전281년 연(燕)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번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한단고기 북부여기 참조>. 진개는 연나라 소왕(서기전311년~서기전279년) 때의 공자(公子)로서 장수(將帥)인바, 만번한까지 차지한 해는 서기전281년경이 타당하다.

서기전232년 기비(箕丕: 서기전232~서기전221년)가 번조선왕이 되었다. 기부(箕否)는 기비(箕丕)의 오기가 된다. 서기전239년 4월 8일에 군사를 일으킨 북부여 시조 해모수(解慕漱)가 기비를 비왕(裨王) 즉 번조선왕(番朝鮮王)으로 삼을 것을 보장하여 군사력으로 단군조선의 오가연정(五加聯政)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여기 요동은 요수(遼水)의 동쪽으로서 양평(襄平) 또는 창평(昌平)을 가리키는 것이 되며 이때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 된다. 이때 요수는 소위 대요수(大遼水)로서 북경 서쪽을 흐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이다.

서기전221년 기준(箕準: 서기전221~서기전194년)이 제75대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었다.

서기전209년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기병하여 중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準)에게 망명(亡命)하므로, 준(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때까지 연나라와 번조선의 국경은 패수의 서쪽이 되는 만번한 지역이므로 연제조의 망명인들이 정착한 곳은 만번한에서 패수(浿水:난하) 사이의 땅이 될 것이다.

서기전209년에 단군조선 진한(眞韓) 땅 소성(蘇城) 출신의 소백손(蘇伯孫)이 조선유민들을 이끌고 서라벌로 와서 정착하여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珍州蘇氏 族譜 참조>.

서기전202년 한(漢)의 연왕(燕王)인 노관(盧綰)이 패수(浿水)를 번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 여기 패수는 지금의 난하(灤河)를 가리킨다.

서기전195년 연왕 노관(盧綰)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도망간 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기준왕은 위만을 상하운장(上下雲障)에 살게 하였는데 상하운장은 당시 국경이던 패수(浿水)의 중하류지역의 바로 동쪽 지역이 될 것이다

서기전194년 기준왕(箕準準)이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여기 한(韓)은 곧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땅이며, 기준왕이 실제 왕노릇 한 곳은 금마(金馬)로서 지금의 익산(益山)이다. 즉, 번조선왕 기준(箕準: 서기전221년~서기전194년)이 위만(衛滿)의 속임으로 나라를 잃고 마한 땅의 금마(익산)로 망명하여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다<한단고기 태백일사 번한세가 참조>. 이후 마한(馬韓)은 그냥 한(韓)이라고 기록되기도 한다.

서기전193년에 기준왕이 1년 만에 죽고 중마한(中馬韓)인 월지국(月支國. 稷山)의 기탁(箕卓)이 제2대 마한왕이 되었으며 이후 서기9년에 백제에 망하기까지 대대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통할하는 진왕(辰王)이라 불리었다<한단고기 북부여기, 기씨 족보 마한세기 참조>. 여기 월지국(月支國)은 목지국(目支國)으로도 기록되는데 하나는 오기가 될 것인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에서는 월지국(月支國)이라 기록하고 있어 목(目)이 월(月)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108년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右渠)에게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다. 여기서 우거의 나라는 단군조선 말기에 번조선의 땅으로서 지금의 요하와 난하 사이에 소재한 발해만 유역이고, 역계경이 갔다는 동쪽의 진국은 곧 요하 동쪽 땅이 되고 진한(辰韓)을 진국(辰國)이라 하였으므로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인 북부여나, 신라 이전의 진한(辰韓)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진왕(辰王)의 나라를 진국(辰國)이라는 취지로 기록한 것이라면 진왕이 있는 마한(馬韓) 땅을 포함하여 진왕이 통할(統轄)하는 한반도 남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기전57년 이후 신라국(新羅國)이 낙랑(樂浪)의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낙랑은 실제로는 한반도인 마한의 낙랑국을 가리키며, 신라는 이 낙랑국의 동남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이 수서의 기록은 대동강에 있던 최씨(崔氏)의 낙랑국(樂浪國:서기전195년~서기37년)을 소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호도(糊塗)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서기20~23년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연간에, 염사착(廉斯鑡)이 한(韓. 辰韓은 韓의 오기)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樂浪)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였다. 이 시기에 대동강 평양지역에 낙랑국(서기전195년~서기37년)이 엄연히 존속하고 있었는데, 이 기록의 취지는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낙랑이라고 의도하는 것이 되어 일단 지금의 난하 중하류 지역에 있었던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바, 실제로 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서기125년에 후한의 안제 시기에 염사착의 후손들이 부역을 면제받았다는 기록이 정확하다라면 역사 사실적으로는 난하유역의 낙랑군이 될 것이다. 

한편, 여기 진한은 당시 시기로 보아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이렇듯 중국사서의 기록은 정확하지 못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의도하여 기록하는 경향이 있어 항상 경계하여야 한다. 그래서 여기 염사착이 정착한 곳이 대동강 평양의 낙랑군을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의도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후한서 동이전 한(韓)에 기록된 염사 사람 소마시는 한(韓)의 염사라고 하여 한(韓.백제)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진한(辰韓)이라고 변개한 것이 된다. 이렇듯 중국사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개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기록의 변천을 파악하여야 역사 사실적으로 정확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된다. 물론, 실제로 염사착이 항복하여 정착한 곳이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인지 대동강 평양 지역의 낙랑국인지는 역사적으로 명백히 규명되어야 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

서기44년 후한(後漢) 건무(建武) 20년(百濟 多婁王 17년)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서기125년 후한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百濟 己婁王 49년)에 이르러서는 염사착의 후손들은 부역(賦役)을 면제받았다.  여기 염사착을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에 정착한 것으로 전제하고 기록한 것이 된다. 이 기록이 조작이 아니라면 염사착이 난하유역에 정착한 것이 맞으나, 앞뒤 기록의 맥락을 위하여 대동강 평양의 낙랑국 지역에 정착한 것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는 없는 것이 된다. 다만, 발해만 유역의 한(韓.백제)에서 바로 인근에 있는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가서 항복하여 정착한 것이라면 앞뒤 기록이 일맥상통하여 역사적 사실로 판단된다. 즉, 왕망 시기에 발해만 유역의 한(韓)이 되는 백제사람 염사착이 인근에 있는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항복하여 정착하였던 것으로 된다. 

서기160~서기180년경 후한 환제(桓帝: 서기132~168년) 때와 영제(靈帝: 서기168~189년)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한(韓; 韓國)으로 유입되었다. 여기 한(韓; 韓國)은 시기적으로 볼 때 곧 마한의 뒤를 이은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곧 소위 한사군인 낙랑군의 인근에 있던 발해만 유역의 백제 관할지역이다. 서기전42년에 발해만 유역의 진번지역 즉 패대지역에 자리 잡은 소서노의 어하라국은 서기전31년에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었다가 이후 서기전19년에 소서노가 죽자 비류가 이었으나 서기전18년에 마한지역의 한강유역으로 와서 시작한 온조십제에 나중에 합쳐진 것이 되는데, 여기가 곧 온조백제의 요서군, 진평군의 개척 기지가 되는 셈이다. 광개토경호태황도 한예(韓濊)를 취하여 연호(煙戶)를 담당하게 하였다고 하는바, 곧 백제와 백제 인근의 예(濊)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기196~220년 후한 건안(建安) 연간(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여기 난하유역의 대방 땅에 후한과 백제 사이의 세력 다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237~239년 위(魏) 경초(景初) 연간(百濟 古爾王 4~6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여기서 대방군과 낙랑군이 한 때 백제(韓)의 땅이 되었던 사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신지와 읍군과 읍장은 마한 시대의 직위로서 이때가 백제 시대임을 감안하면 시대착오적인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서기246년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려(高麗)를 쳐부수었을 때 옥저(沃沮)까지 달아났던 고구려인들이 그곳에 남았다가 신라(新羅) 사람이 되었다(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複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 이 기록에서 일부의 해석으로 옥저에 남았던 고구려인들이 신라를 세웠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신라는 서기전57년에 이미 건국되었으므로 신라로 귀화하거나 복속하여 신라 사람이 되었다라고 해석하여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이 된다.

서기276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함령(咸寧) 3년(백제 고이왕 43년)에 백제가 조공하였다. 

서기277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함령 4년(백제 고이왕 44년)에 백제가 내부(內附)를 청하였다. 여기서 백제가 외교 전략상 조공하였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으나 내부를 청하였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과장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기280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元年)에 백제(고이왕 47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81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2년에 백제(고이왕 48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조공하였다.

서기286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7년에 백제(고이왕 53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또 조공하였다.

서기287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8년에 백제(책계왕 2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88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9년에 백제(책계왕 3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89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10년에 백제(책계왕 4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90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희(太熙) 원년(元年)에 백제왕(책계왕 5년)을 동이교위(東夷校尉)로 삼았다.

서기521년 송(宋) 보통(普通) 2년에 왕 모(募)가 이름이 진(秦)으로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여기 송(宋)은 위진(魏晉:220~420) 이후의 남북조 시대(420~589)의 송(宋:420~479)이다. 이때의 신라왕은 법흥왕(法興王:514~540)이다.

서기551년 백제가 신라와 고구려를 합공하여 한강 하류의 6군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진흥왕은 이해에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하였으며, 거칠부가 백제와 합공하여 죽령 이북(한강 상류지역)의 고구려의 10개성(군)을 빼앗았다. 

서기553년 신라는 백제의 한강 하류 6군을 차지하여 버렸다.

서기554년 7월에 백제가 대가야와 손잡고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공격하였다가, 구천에 매복하였던 신라의 복병에 걸려 신라의 비장인 고간, 도도의 급습에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이 죽고 말 한필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에 나제동맹이 결렬되었다. 

서기562년에 신라는 마지막으로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가야를 모두 병합하였다.

서기594년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16년)이 수나라 개황(開皇) 14년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고, 고조(高祖)가 진평(眞平)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삼았다(傳祚至金真平,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高祖拜真平為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서기605년 이후 신라는 수나라(서기581년~서기618년)에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라 진평왕(서기579~632년) 시대이다. 수나라 제2대는 양제(煬帝:605~617)이며, 제3대 공제(恭帝:617~618)는 수양제의 손자로 당 고조 이연이 세운 곡두각시 황제이며 618년 당나라에 선위하고 다음 해에 피살되었다. 양제(煬帝)는 원래 명제(明帝)이나 당나라가 비하하여 양제(煬帝)한 것이 된다.

서기621년 신라는 당나라 무덕(武德) 4년(新羅 眞平王 43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고, 고조(高祖)는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를 사신(使臣)으로 보내어 새서(璽書) 및 그림병풍과 비단 3백단(百段)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 당나라가 보냈다는 그림병풍을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보고 벌과 나비가 없어 함께 보내온 모란씨를 심으니 과연 향기가 없었다라고 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은 덕만(德曼)이 여왕이 아닌 약 42세 공주시절의 일이다.

서기624년 당나라 고조(高祖)는 무덕(武德) 7년(新羅 眞平王 46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김진평(金眞平)에게 주국(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하였다. 

서기631년 신라가 당나라 정관(貞觀) 5년(新羅 眞平王 53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여악공(女樂工) 두 사람을 바쳤는데, 당나라는 이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서기631년에 진평왕(眞平)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 선덕(善德)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 종실(宗室)로서 대신(大臣)인 을제(乙祭)가 국정(國政)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진평(眞平)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물(賻物) 2백단(段)을 내려 주었다. 여기서 신라 진평왕은 실제 632년 1월에 사망하였는데 앞당겨 적고 있는 것이 된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자치통감에서는 선덕여왕이 정관 25년인 서기651년에 사망하였다고 하여 정관 21년인 서기647년 1월에 사망한 것과 다른데, 이는 선덕여왕의 배필인 갈문왕(曺繼龍:571~651)이 사망한 해가 된다. 


(이하 생략. 서기841년까지 주로 조공과 책봉 기록임.)


서기923년 동광(同光) 원년(新羅 景明王 7년) 에 신라국왕 김박영이 (후당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서기933년 장흥(長興) 4년(新羅 敬順王 7년)에는 권지국사 김부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왔다. 

서기936년 후진(晉:936~946) 이후부터는 신라의 사신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여기서 후진은 당(唐:618~907) 멸망 이후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오대 중 세 번째 나라이며, 신라는 서기935년에 고려(高麗)에 항복하였으므로 당연한 기록이 된다.


결어 

이상의 중국사서 동이전 기록의 경향상 특징을 요약하면, ①왕망(王莽)의 지황(地皇) 연간(서기20년~서기23년) 이전의 시기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특정한 시기나 연대를 알 수 있는 표기를 하지 않고 사건을 요약하다시피 간략히 기록하고 있으며, ②신라와 백제가 이미 건국된 이후에도 진한(辰韓)이나 마한(馬韓) 또는 한(韓)이라고 표기하여 국명을 구분하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고, ③특히 지명과 관련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에 관한 기사는 서기전108년경에 한(漢)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하였다는 발해만 유역의 소위 한사군의 낙랑(樂浪)과 후대에 낙랑군의 남쪽을 분할하여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최씨의 낙랑국(서기전195년~서기37년)임을 의도적으로 나타내는 왜곡적인 기록을 하고 있으며, ④풍속(風俗)이나 관제(官制) 관련 기록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 참고할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반면에, ⑤서기594년부터 신라 진평왕 이후의 신라의 조공(朝貢)과 책봉(冊封) 관련 기록은 빠짐없이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중국사서 동이전 상의 기록은 그 기록자들이 각 그 이전의 기록을 참고하거나 역사적으로 밝혀지지 아니한 우리 측의 사서를 얻어 인용하듯 요약하는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되며, 그들의 역사를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한편 그들의 역사와 인적 국가적으로 관련된 우리역사는 어떻든 그들의 인적 국가적 영향권에서 성립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을 띠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역사의 비밀을 담고 있다거나 우리기록에는 전혀 없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식의 망상이나 맹신은 절대 금물이다.

결국, 중국사서 동이전의 기록들은 삼한(三韓)과 신라(新羅)의 풍속(風俗)이나 관제(官制)와 관련된 내용은 요약정리 하는 차원에서 그 나름 가치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반면에, 조공이나 책봉 관련 기록 외의 역사적 사건 관련 기록은 시기나 연대를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지 못하여 일면 우리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보며, 특히 동이전 기록자들이 우리의 삼한시대나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 거칠부의 國史 등)를 분명히 참고하여 인용이나 요약하는 차원에서 기록한 것으로 된다.

이상으로, 중국사서 동이전 삼한과 신라의 기록은 시기나 연대기적으로 자세하지 못하여 무조건 정확하다고 맹신할 것이 못 되어 우리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왕검조선) 편의 기록처럼 역사를 압축한 요약서로 이해하면 될 것이고, 소위 한사군 관련 기록처럼 왜곡하거나 왜곡을 시도하는 경향의 기록은 항상 유의하여 옥석을 가려 해석을 하여야 할 것이며,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근거된 사료를 반드시 확인하여 올바른 해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바, 결론적으로 동이전 기록은 단지 우리역사를 이해하는 데 주된 사료가 아니라 오로지 참고적인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餘論

지금의 중공은 동복공정이라는 역사왜곡 작업에서 수(隋)·당(唐) 때부터 이루어진 고대 중국과 고대한국의 신라, 고구려, 백제와의 조공책봉 관계를 형식적인 외교관계가 아닌 사실상의 지방정권으로 비하하여 취급하는 작태를 벌이는 빌미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이후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 당의 야욕으로 인한 신라와의 전쟁은 지방정권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오만에 찬 악의적 광란의 장난인 것이다. 

수나라는 순수한 한족(漢族)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예인 선비족(鮮卑族)과의 혼혈족으로서 중원대륙을 차지한 나라로 천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고구려와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으나, 고구려의 살수대첩에서 30만 명의 군사가 몰살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가지며 그 여파로 결국 망해버린 나라에 불과하다. 순수한 한족이 아니어서 고대 중국이라고 못 박을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당나라 또한 수나라와 똑같이 혼혈족으로서 고구려와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나라로 전쟁 때마다 고구려에 혼쭐나다가 결국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이 박힌 당태종이 대패하여 도망하다가 연개소문에 의하여 하북, 산서, 산동, 오월 등지를 고구려에 내주는 장안성(長安城)의 굴욕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 불과하며, 만약 신라가 없었다면 그 역사를 장담할 수 없었던 나라임을 염두에 두고 따져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배달나라의 한 제후였던 천자(天子)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상제(上帝)인 치우천왕(治尤天王)을 죽였다고 왜곡시킨 데서 시작된 고대중국의 역사조작은 끝없이 이어져 내려오다 이제는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조작을 끝판왕식으로 하고 있으니, 그동안의 중국이라는 나라는 왕도(王道)를 실현하던 진정한 천자국(天子國)이 아니라 치졸하기 그지없는 역사조작의 달인들이었다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原著 一始堂主人 桂延壽, 校閱 海鶴 李沂, 定本 桓檀古記, 한뿌리, 2005,

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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