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한桓철학 7]
화쟁和諍은 홍익弘益이론의 동본이상同本異象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후 우리 나라 승려들에 계승되었음은 물론, 중국의 법장法藏과 징관澄觀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크게 신봉되어 명혜明慧, 선주善珠, 의연疑然등은 원효의 설을 그대로 계승하여 일본 불교의 근간이 되어왔다.
화쟁은 홍익이론의 동본이상同本異象
원효의 화쟁사상을 계승하여 널리 선양한 고려시대의 고승으로는 의천義天이 있다. 그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천태종天台宗을 창건하여 화엄을 비롯한 여러 교학과 선을 일치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는 화엄종에 속한 승려였지만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에서 각각 성性과 상相의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쟁론을 계속하였으므로 성상융회性相融會를 내세워 이들을 화쟁시키고자 하였다. 나아가 지관止觀의 수행을 중시하는 천태종을 창종하여 선종과의 화쟁도 꾀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관병수敎觀幷修사상은 화쟁의 원리를 가장 잘 채택한 것으로, 우리 나라 불교의 한 전통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의천이 교의 입장에서 선을 수용하려고 하였던 데 반하여, 지눌知訥은 선을 중심에 두고 교를 통화하려 하였다. 그는 참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나 그것이 둘이 아님을 잊지 않았고, 선종의 승려로서 평생을 참선에 몰두하였지만 틈틈이 불경을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눌은 부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이요 부처의 말을 깨닫는 것이 교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고 함께 닦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오늘날 지눌을 선교합일禪敎合一의 주창자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구현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화쟁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그 이후 우리 나라 불교는 선과 교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고 볼 수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지눌의 정혜쌍수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선과 염불의 일치를 주장하여 선과 교와 염불의 조화를 정착시켰다. 그 뒤로 이 셋을 함께 공부하는 사상적 조류가 계속됨에 따라 우리 나라 불교는 종파를 중심으로 한 사상적 논쟁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조선왕조 500년의 억불책 속에서도 불교가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전승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화쟁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왕실과 유생들의 탄압을 쟁으로 맞서기보다는 화의 정신에 입각하여 쟁을 이겨나갔고, 오히려 쟁을 화로 승화시켜 그들을 교화시켰던 것이다. 화쟁사상은 절대자유와 평화를 이상으로 삼은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 불교가 힘을 잃지 않고 꽃피우게 된 절대적 근간이 된 것이니 그 국선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불교계는 미륵불신앙을 중심으로 칠성신앙, 산신신앙, 용왕신앙, 아미타신앙, 관세음보살신앙, 지장보살신앙, 다라니신앙, 독성獨聖신앙, 약사여래신앙등이 모두 수용되는 한국불교만의 톡특한 불교신앙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이름만 다르지 모두 한桓사상에 포함되어있다.
설총을 낳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
설총이 이두를 정리한 사람 혹은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이에서 계획없이 태어난 아들로 3류 소설의 주인공으로 회자되는 것은 크나큰 오류가 아닐수 없다. 자신의 철학과 학문을 계승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면 불문佛門에서 이미 목적을 이룰수 있었을텐데 굳이 왕족과 파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혈연 관계를 맺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신라의 상황과 주변국의 상황을 보면 옛조선 3국중 법통을 이은 진한의 후계가 확실한 신라왕실의 난감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몰락해가는 삼한의 법통맥을 잇기위한 포석으로서 국교인 불교를 통한 계승의 의도로 보인다. 삼국통일 후 벌어질 문화적 혼란, 학문의 위계, 철학의 실종을 염두에둔 일종의 정리 인 것이다. 부친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설총의 이두에는 훈과 독을 모두 채용하는것 뿐만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없어질지도 모르는 언어, 문자에 대한 다양한 정리식 접근이 보여지고 있으니 원효스님이 직접 개입한 흔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서 '판비량론'에 일본 신대문자의 원조글이 실려 있다. 일본인들이 한글의 원조라고 주장해오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뿌리 근根자 옆에 화시火是라고 써 놓았다. 화시는 불 火, 이 是인데 우리말로 읽으면 '불이' 즉 뿌리 근根자를 써놓고 '뿌리'로 읽었다는것 아니겠는가?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전제를 가해도 1300년 전 원효의 아들이 이런식으로 정리해두지 않았다면 아니 원효의 기지機智가 발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뿌리'라고 하지 못하고 중국말 '끈ggen' 내지 '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계승이 설총을 낳았다는 변명을 이것으로 대체하고자 하는것은 아니다. 삼한의 방대한 역사외에 원효가 걱정한 것은 영영 잃어버리고 후세에 전해질 위대한 선조의 유산 '한문화'의 실기失期였기 때문이다.
화쟁은 독특한 사상이 아니라 한철학
원효의 불교 이해는 당시 우리말에 바탕한 것이고, 그것을 다시 한자로 투사, 표현한 것이 화쟁이라는 가정하에, 한문화의 자연스러운 불교 신앙으로의 훈습熏習은 그만의 방식으로 한철학이다. 원효가 이해한 ‘우리’는 ‘나 없는 지극한 나無我之至我, ‘나 아닌 큰 나不我之大我이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을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요無理之至理, 그러하지 않은 큰 그러함不然之大然으로 이해하고, 이런 말들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우리’들 속에서는 다양성과 차이가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不相違), 모두 도리가 있고(皆有道理), 잘 통하며(善通), 다 얻을만한 게 있어(悉得), ‘조화로운 겨룸’(和諍)으로 이해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원효는 ‘우리’들 세계에서 나와 남을 모두 살리고 함께 살아가고 사라(사라짐) 어울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본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의 정서와 믿음 속에서 개념을 찾고, 코드를 일치시키고자 노력한 결과이었으며 홍익하는 사관, 제세이화를 지향하는 한민족적 법맥을 잇고자한 속 뜻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글 : 배달문화원 임보환 원장
출처 : 참환역사신문13호(창간1주년 기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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