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제후국을 침공하다가 대패한 은나라 무정(1)
소태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진(BCE 1337)년이다. 은나라 왕 소을(小乙, 21세)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재위47년 경인(BCE 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 22세)이 전쟁을 일으켜 이미 귀방(鬼方)을 물리치고 나서 대신 군대를 이끌고 삭도(索度)와 영지(令支) 등 여러 나라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재위 49년 임진(BCE 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공격하여 멸망시키자, 일군(一群).양운(養雲)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 고등이 대군은 장악하고 서북 지방을 경략하니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고등이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이 되기를 주청하였다. 임금께서 꺼리시며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거듭 청하므로 윤허하시고, 두막루(豆寞婁, 북사에서는 두막루국은 물길에서 1천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옛날의 북부여이다)라 불렀다.
*귀방(鬼方)~지금의 중국 산서성 북쪽 내몽골의 음산산맥 일대에 살던 족속이다. 은나라 때는 빈(邠)지역에 살던 주나라 조상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아들의 침략을 피해 기산(岐山) 남쪽 위수(渭水)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다.
*고공단보~중국 은나라 제후국인 주(周)의 제후이다.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단보(亶父)이다. 훗날 서주 무왕의 태왕(太王)으로 주승했다. 주승되기 이전은 고공으로 칭해졌고, 사기에는 그 고공과 이름인 단보를 합쳐서 고공단보로 칭하였다.
그는 사병을 거느리고 빈을 떠나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른 건너고 양산(梁山)을 넘어서 기산(岐山) 아래 정착했다. 이 때 태왕은 융적의 풍습을 개량하고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살게하였다. 황제의 35대 손이며, 후직의 12대손이다.
고공단보의 3남이 계력(季歷)이며, 계력의 아들이 주문왕이다.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삭도(索度)~곧 삭두(索頭)로 '독사방여기요'를 보면 "산동성 임치현에 삭두성(索頭城)이 있다.
*영지(令支)~'한서지리지 요서군' 조를 보면 "고죽성이 있다"라 하였다. 지금의 하북성 천안현 서쪽이다.
*고등~22세 색불루단군의 할아버지이다.
*좌.우현왕 제도~이 제도는 천자를 좌.우에서 보필하는 제도이다. 고조선 초기 진한의 천황 대단군을 변한과 마한의 부단군이 좌.우에서 보좌하는 비왕(裨王)제도이다. 이 제도는 삼신 사상을 기초로 해서 성립된 것으로 흉노에게로 전파되었다.
*두막루~두막루국은 물길에서 북쪽으로 1천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옛날의 북부여다.
고구려 문자열제 때에 부여가 멸망한 뒤 그 유민이 북으로 이동하여 두막루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도 두막루라 하였다. 막루는 마을 또는 고을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두는 최고를 나타내는 접두사로 고을을 다스리는 총수격에 해당하는 관직, 최고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143
#한자원문해설은 이암의 환단고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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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의 손자 색불루의 혁명(2)
재위 52년 을미(BCE 1286)에 우현왕 고등이 훙서(薨逝)하고,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왕을 계승하였다.
임금께서 나라를 순수하시다 남쪽 해성(海城)에 이르러 부로(父老)들을 크게 모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셨다. 이때 오가(五加)를 모아 놓고 옥좌를 양위할 일을 함께 의논할 때 "내가 이제 늙어 일하기가 고달프다"라고 말씀하시고, "서우여(徐于餘)에게 정사를 맡기겠노라"하셨다. 이에 살수(薩水) 주위의 땅 백리를 분봉하여 섭주(攝主)로 삼고 기수(奇首)라 하셨다.
*서우여(徐于餘)~21세 소태단군이 욕살 서우여에게 제위를 선양하려하자, 우현왕 색부루가 극력 반대하므로 마침내 서우여를 패하고 서인으로 만드셨다. 이에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으로 돌아가 수천 명과 모의하여 기병하였다. 그 후 색블루 단군이 친히 삼한의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려 할 때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하고, 비왕으로 봉할 것을 약속하였다.
서우여는 이를 따르자 30세 번한 왕으로 임명하여 번조선을 다스리게 하였다(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 번한세가 하 참고)
*섭주와 기수~섭주는 단군을 대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기수는 섭주가 관할하는 이름이거나, 섭주의 보직 명칭인 것으로 추정된다.
★은.주 교체기,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3)
우현왕이 소식을 듣고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멈추시기를 청하셨다. 임금께서 끝내 듣지 않으시므로 우현왕이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 천명을 이끌고 부여 신궁(夫餘申宮, 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만주 일대 농안)에서 단군으로 즉위하셨다. 부득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우현왕에게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임금께서 아사달(지금의 하얼빈 완달산)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최우를 마치셨다.
이 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로서 왕위를 사양히고 달아나 동해 쪽 물가에 살면서 스스로 밭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
*백이와 숙제~백이.숙제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지금의 하북성 난하 유역)의 왕자로서 동이족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폭군 주왕(纣王)을 정벌하려고 쳐들어 오자 백이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서 "왕 이시여, 당신은 아버지(文王)가 돌아가시고 아직 상(喪) 중에 있는 데, 전쟁을 하려 하니 어찌 효(孝)라 할 수 있으며, 또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를 침탈히려 하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여 직언하였다(사기 백이열전) 그러자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강태공이 의인의 말이라 하여 처벌을 면하게 해주었다.
마침내 무왕은 은을 쳐서 천하의 반을 차지하자 백이.숙제는 역성혁명을 인정할 수 없다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최우를 마쳤다.
*고죽국~고죽국은 은대 제후국으로 북경 하북성 연산 일대를 세력권으로 춘추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사기 주본기'에서는 "고죽의 옛 성은 평주 노룡현에서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은나라의 제후국이다"라고 하였다. '사기집해'에는 "요서군 영지현이다"라고 하고 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143~145
#한자원문 해설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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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세 단군 색불루 _ 재위 48년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김
색불루 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신(BCE 1285)년이다. 임금께서 녹산(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 임금께서 녹산(鹿山)의 성(城)을 개축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가을 9월에 장당경에 행차하여 종묘(宗廟)을 세우고 할아버지 고등(高登)에게 제사를 지냈다. 11월 친히 구환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레 벌여 은나라 수도를 함락하고 잠시 강화(講和)하였으나, 또 다시 싸워 크게 격파하셨다.
*관제개편~'태백일사 삼한관경 마한세가'에 22세 색불루 단군께서 재위 원년 5월에 삼한을 삼조선으로 하였는 데, 조선은 관경(영토관할)을 말하다. 여원홍을 마한왕으로 삼고, 서우여를 번한왕으로 삼아 다스렸다. 이를 총칭하여 단군관경이라고 하니, 이것이 진국(辰國)이다.
이듬해 2월에 황하 상류까지 추격하여 대첩의 하례(賀禮)를 받으시고, 회수와 태산 지역에 변한(弁韓) 백성을 이주시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시어 국위를 크게 떨쳤다.
재위 6년 신축(BCE 1280)년에 신지 육우(陸右)가 주청하기를" 아사달은 천 년 제업(帝業)의 땅이나 대운이 이미 다했고 영고탑은 왕기가 농후하여 백악산보다 나으니, 청하옵건대 그곳에 성을 쌓고 천도하옵소서"
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새 수도를 이미 자리를 잡았거늘 어찌 다른 곳으로 옮기리오" 하셨다.
재위 20년 을묘(BCE 1266)년에 이르러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국(孤竹國)왕과 더불어 모든 도적을 쫓아 버렸다.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머무르니 그곳은 은나라 국경과 가까운 곳이다.
임금께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력을 나누어 빈(邠).기(岐) 땅으로 진격하시고, 그곳 유민과 서로 단합하여 나라를 세워 그 이름을 여(黎)라 하셨다. 이들은 서쪽 융족(西戎)과 더불어 은나라의 제후국들안에서 뒤섞여 살게 하셨다. 남씨의 위세가 매우 강성해지고, 임금의 덕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쳤다.
재위 36년 신미(BCE 1250)년에 변방 장수 신독(申督)이 난을 일으켜 임금께서 잠시 영고탑으로 피난하시니 많은 백성들이 뒤를 따랐다.
재위 48년 계미(BCE 1238)년에 색불루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아홀(阿忽)께서 즉위하셨다.
*여(黎)~치우천황 때 구려(九黎)의 약칭, '상서'에 "구려는 치우의 백성이다. 왕동령도 '중국민족사'에서 "구려는 치우의 백성이다"
남국의 여파달이 빈.기에 웅거하며, 하나라 말기부터 그곳에 거주하던 고조선 사람들과 힘을 합해 여(黎)국을 세운 사실은 漢族 고대 사서에 엄연히 기록되었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주나라 선조인 고공단보는 당시에 빈에 거주하고 있었다. 훈육과 융적이 공격해 재물과 땅을 요구하자 고공단보는 싸우고자 하는 백성들을 만류하고 기산으로 옮겨갔다. '사기 주본기, 사기정의'에서는 "기국(耆國)은 곧 여국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여국은 빈.기 땅에서 멀리 물러나오게 되었다. 그 잔영이 지금도 여성(黎城, 산서성 여성현)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3), pp14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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