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년 유총이 사망하자 한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유총의 아들인 유찬(劉粲)이 죽고 병주 중남부 일대를 반란군이 점거한 상태가 되자 석륵이 유총의 차남인 유요(劉要)의 명을 받아 출정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석륵의 군대에 패배한 반란군이 유요에게 항복하자 석륵은 분노하여 한나라의 수도 평양(平陽)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유요와 화친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으나 평양을 공격한 것에 대한 원한 때문에 유요는 석륵의 사자를 죽이고 화친을 거부했다. 그러자 석륵은 양국에서 조왕(趙王) 지위에 올라 유요와 전쟁을 개시했다. 사가에서는 유요가 이미 한나라에서 조(趙)나라로 국호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前趙),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로 불렸다.
이 때 갈족의 용병으로 단 선비가 참여하여 유요와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석륵이 남하하자 기존의 석륵이 차지하고 있던 하북성에서 모용선비가 세력을 확대하여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329년 유요가 석륵에게 대패하고 전조가 후조에게 멸망하자 남쪽에 전량(前梁)이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고 석륵은 낙양으로 들어와 330년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석륵이 떠난 하북성에는 모용외(慕容廆)가 세력을 확장하였고 연왕(燕王)을 자칭했다. 이 때 단 선비가 조금씩 강성해져 하북성 일대에서 모용선비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때가 단란(段蘭)이 부족장이 되어 있었던 시기이다. 필자는 단 선비와 모용선비의 전쟁이 하북성의 패권을 놓고 격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석륵이 있고 산동성 이남에는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가 도주하여 세운 동진(東晋)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용선비가 아직 세력이 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북성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에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 선비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33년 모용외가 사망하고 모용인(慕容仁)이 난을 일으키자 단 선비는 모용선비를 몰아내기 위해 모용인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336년 모용인은 난을 실패하고 전사했다. 곽충(郭充), 동수(冬壽)는 고구려로 망명했고 나머지 모용인의 세력은 모용황(慕容皝)에게 참살될까 두려워 단 선비에 항복해왔다. 단 선비에 투항한 장수 중에 모용한(慕容翰)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지략과 용맹이 모용외 못지않아 모용외에 총애를 받았던 왕자였다. 모용한(慕容翰)은 바로 단 선비 군의 장수가 되어 군을 이끌고 모용황을 다시 공격하러 나섰다. 단 선비는 모용황을 유성(柳城)에 몰아넣고 공격을 개시하니 모용선비가 순식간에 멸망할 위기에 놓였다.
궁지에 몰린 모용황은 평주에 주둔하고 있는 모용한(慕容汗)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모용한(慕容汗)은 성급히 들어오다가 패배를 당해 자멸하고 말았다. 이 때 단 선비의 군대를 이끌고 모용선비를 공격하고 있던 모용한(慕容翰)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거 같다. 그것은 모용씨의 멸족을 우려한 것도 있고 모용한(慕容翰)이 단 선비에 망명할 때 가족은 그대로 모용선비에 두고 나왔다. 그러자 모용황이 모용인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모용한(慕容翰)의 가족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모용한(慕容翰)의 성정을 자극했다.
일찍이 모용황은 모용인의 가족들과 모용인에 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했던 장수들의 가족들은 잘 대해줄 것을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모용선비 내부의 결속과 포용, 정치적 안정화를 위한 포석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략은 모용씨 내부에서 단합된 힘을 축적하고 발휘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되었으며 337년 모용황이 황제로 등극하는데 있어 내, 외부에 물리적 현상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안정된 상태에서 외부를 향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모용한(慕容翰)은 더 이상 유성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를 풀었으며 이에 단 선비는 모용한(慕容翰)의 반역을 의심했다. 모용한(慕容翰)의 심경 변화로 인해 단 선비와 모용한(慕容翰)의 관계가 틀어졌고 모용황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단선비의 공격과 모용인의 반란으로 한때 멸망의 위기까지 겪었던 모용황은, 곧 전열을 재정비하고 단 선비와 재 전쟁에 돌입했다. 337년 11월에 단 선비를 공격한 모용황은 하북의 중심인 양평(襄平)을 함락하여 단 선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단 선비는 산동성 제남(齊南)으로 쫓겨 가서 수세를 취했으며, 전선은 고착되었다. 이러한 소강상태는 340년까지 계속되었다.
선비와 중원의 격돌
단 선비와 모용씨 선비의 격돌
모용황의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