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하노이 역사박물관에서 22담로와 베트남 기원에 대해 탐사 연구 중 베트남 친구이자 통역자에게서 사람이 죽으면 장독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3장 정도 있는 사진들이다.
그렇다. 이것은 옹관묘다. 이 옹관묘의 분포는 한반도 전라도 지역, 그리고 일부 중국 동해안 지역과 베트남에 분포되어 있다.
옹관묘의 연대는 5~6세기, 때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했지만 여전히 해상왕국으로 건재를 과시할 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해상왕국 근거의 기록이 있다.
"이 해 위나라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 · 찬수류 · 해례곤 · 목간나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 남제서 권58 동남이열전 백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에 강병이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주와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
"10년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조)
"근구수왕이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 하여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연(燕)과 부씨(符氏)의 진(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遼西) · 산동(山東) · 강소(江蘇) · 절강(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위 기록들을 보면 백제가 5~6세기에 한창 해상활동이 왕성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베트남의 옹관은 같은 시기 어떻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일까?
그런데 <구당서-백제전>에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이다. 그 동북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裏,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西渡海至越州" 이것이다.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보유하여 그 영토는 월주(越州)와 접경한다." , 혹은 "서쪽으로 월주(越州)를 영토로 삼아 땅이 여기까지 이른다." 한다는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월주(越州)는 남월(南越)을 말하는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명치 11년(AD 502) 11월에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였다." (明治 十一年 十一月 攻取越州)
중국 남부 광서장족자치구에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은 여기 계신 분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송기윤, 이도학 등의 학설에 의하면 이 지역에 진평군이 있다 한다. 만약 그 학설이 맞는다면 월주(越州)의 위치는 북베트남 지역이 유력한 셈이다.
그리고 남은 두 장의 사진은 전라도에서 발견된 옹관묘다. 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4번째 사진 것은 옹관 한쪽은 아예 베트남 것과 판박이다. 마지막 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이 역시 두 옹관을 떨어뜨려 놓으면 비슷한 형태가 된다.
옹관은 아무나 매장되지 않는다. 최소한 가장 높은 계급, 제사장이나 지도자 급 정도가 매장되는 관이다. 이러한 유사성은 베트남이 백제의 22담로 중 하나였다는 근거를 추론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