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전86년 을미년(乙未年)에 고두막 천왕이 즉위하였다. 북부여가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고두막(高豆莫) 천왕께서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山分 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 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都城)에 들어와 북부여(北夫餘)라 칭하였다.
이에 해부루는 분릉의 왕 즉 동부여왕으로 봉해졌는데, 고두막 천왕의 제후에 해당한다. 분릉(山分 陵)은 일명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한다. 분릉은 낮은 산이나 언덕 형태를 나타내고, 가섭원은 숲이 우거진 벌판을 나타낸다.
해부루 천왕이 강등되어 동부여왕으로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곳이 상춘(常春)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길림(吉林)이 된다. 길림(吉林)이라는 글자는 가섭원(迦葉原)과 의미상으로 통한다. 상춘이 북부여로서 북부여 전체의 수도(首都)라면, 길림은 동쪽의 부여 땅이 되어 동부여(東扶餘)가 되는 것이다. 길림의 동쪽 송화강 건너의 땅은 숙신(肅愼)의 땅이 된다.
이때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아사달의 신궁(新宮)인 천안궁(天安宮)이며, 동명왕 고두막한이 해부루 천왕을 동부여로 옮기게 하고, 여전히 수도로 삼아 북부여라 칭한 것이 된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천왕은 국호를 북부여라 칭한 것이 아니나 후대의 역사로 보아 북부여라 불리는 것이 되고, 고두막 천왕이 국호를 북부여라 칭한 것이 된다.
나. 동부여 제1대왕 해부루(解夫婁:서기전86년~서기전48년)
서기전86년 을미년(乙未年)에 해부루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분릉)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부여 고두막 천왕으로부터 강등되어 제후(諸侯)인 지방의 왕(王)으로 봉해졌다. 가섭원은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법,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다. 동부여 땅의 정춘요(正春謠)
서기전84년 정유년(丁酉年)에 동부여 해부루왕이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릉을 기름지게 하는 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정춘이란 “진짜 봄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라. 한(漢)나라 도적들을 격파하다.
서기전86년 을미년 가월 8월에 서압록하(西鴨綠河)의 상류에서 한구(漢寇)와 여러 차례 싸워서 이겼다.
서압록하는 지금의 요하(遼河)를 가리키는데, 서기전86년 이후 서기전82년에는 서압록하 서편에 위치한 진번과 임둔을 북부여가 수복하게 된다.
마. 진번과 임둔을 수복(收復)하다.
서기전82년 기해년(己亥年)에 한사군의 속하였던 진번군과 임둔군을 수복하여 북부여에 속하게 하였다.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서기전82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과 현도에 소속시켰더니 뒤에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겨 갔다<東夷傳 濊>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소위 춘추필법에 의한 기록이며, 실제로는 진번군과 임둔군이 북부여에 수복된 것이 된다.
바. 고모수(해모수)와 유화부인
서기전80년 신축년(辛丑年)에 하백녀(河伯女:하백의 딸) 유화(柳花)가 나들이를 나갔는데 북부여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昇天)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고진의 손자가 된다. 여기서 승천하였다는 말은 고모수가 정사(政事)를 보러 중앙조정(中央朝廷)으로 복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하백(河伯)의 땅은 지방이 된다.
사. 고주몽의 탄생
서기전79년 임인년(壬寅年) 5월 5일에 고주몽이 탄생하였다.
유화부인의 부모가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는 것에서 고주몽은 외조부 하백(河伯)의 집 즉 어머니 유화부인의 친정에서 태어난 것이 되고, 이후 유화부인이 어린 고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갔다가 사방을 주유(周遊)하다가 동부여로 간 것이 된다.
고모수가 승천(昇天)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기록되는 것은 고모수가 유화를 임신시키고는 북부여 조정(朝廷)으로 들어가서는 찾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고모수가 사망하였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서는 유화가 나중에 고주몽을 데리고 고모수의 친가(親家)인 시가(媤家)가 있는 북부여 웅심산으로 갔던 것이며, 이후 사방을 주유하다가 고주몽이 5세경에 동부여로 간 것이 되므로, 고모수는 아마도 고주몽이 어릴 때 사망한 것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해부루왕이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으며, 이에 유화부인이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라고 기록되는데, 이때 고주몽은 이미 5세였던 것이 된다. 해부루와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는 6촌형제 사이가 된다.
이름을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朱蒙)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 된다. 추모(鄒牟)는 주몽(朱蒙)과 같은 소리를 적은 이두식 표기가 된다.
아. 해부루왕이 금와를 얻다.
서기전77년 갑진년(甲辰年)에 해부루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모양이었다. 해부루왕은 몸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를 금와(金蛙)라 하고 그가 성장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자. 태자 고무서의 즉위
서기전60년 신유년(辛酉年)에 고두막 천왕께서 붕하시니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지내고, 태자 고무서가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