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지복에 이르는 두 가지 원인
첫째원인 :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느님에게 무한의 복종과 인내를 보여드림으로써,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를 행동으로 실천(전체의식의 삶)하며 인정하는 거예요.
무한도 두 가지가 있으니, 1.처한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동(動)적인 것과 2.처해진 여건에서 무한히 인내하는 정(靜)적인 것이 있지요.
무한의 강도에 따라 지복의 강도도 달라집니다.
둘째원인 : 생활속에서 전체의식을 실천하여 나의 앎을 전체성인 하느님의 앎과 보다 깊고 넓게 일치시키는 거예요.
생활속에 실천하며 느낀 앎도 1.질과 2.량으로 두 가지이며, 그 깊이와 넓이가 깊고 넓을수록 지복의 강도는 강해집니다.
두 가지 원인 중, 둘째 원인인 앎의 성장은 인간영이 존재하는 곳이면 자연계, 마음계, 영계, 영계핵 모두 느낌이 있어 새로운 앎이 성장하지만,
마음계, 영계, 영계핵은 무시공간으로 무엇이나 뜻대로 이루어지는 곳이므로 첫째 원인, 즉 하느님을 위해 무한을 바칠 수 있는 1.최선과 2.인내의 여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원인 성장은 오직 자연계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그 결과, 하느님이라는 존재도 모르고 또 절대복종 사상도 없던, 그 오랜 예전부터
착하게 살다가 저승에서 완전해탈하여 천사(하느님에 대한 앎과 절대복종이 없기에 천자가 못됨)까지 된,
인간영들은 첫째 원인을 실천하여 둘째 원인의 의미까지 찾고자하여, 하느님이 인류구원사업을 일으키시자
심부름(천사)을 하며 절대복종하는 인간들에게서 같이 앎을 키워온 것이지요.
이것이 하느님 인류구원사업에 협조해 나온 구약천사와 신약성령의 활동입니다.(성령에 대해서는 다음 시리즈 5편에 자세히 나와요.)
이렇게 자연계의 생활에 있어서 하느님에게 무한을 보이는 것은 아주 절대 절명의 중요한 것이지요.
자연계에서 무한의 복종과 인내를 실천하고 앎을 배우며,
저승에 가서도 다른 영들과의 앎 교류를 통해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과 그 질이 점차 가까워진다는 것은,
인간영의 영원한 기쁨이예요.
(14) 지복으로 이르는 두 가지 방법
인간이 생활 속에서 개체 인습과 목적을 털어 완전해탈을 이루는 방법도 두 가지이며 서로 상대적이예요.
첫째방법 : 인간은 느끼기 위해 존재하므로 느끼고 싶은 것은 느껴서 목적을 털어버리는 방법이지요.
습관도 인습이니 없애야 해요. 인도의 밀교(密敎)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방법 : 인간은 개체이기에 느끼고 싶을 때, 여건의 정상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있을 수 있어요.
이때 여건이 불가능하면 깨끗이 체념하여 그 목적을 털어버려야 해요. 인도의 현교(顯敎)적인 방법이지요.
이와 같이 느껴서 털고, 체념해서 털어, 항상 해탈의 상태에서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무한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 그리스도의 길이며 방법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해탈의 방법도 서로 절대적인 상관관계가 있지요.
(15) 같은 질이지만 상대적인 상관관계
1.느끼는 방법이 없이는 2.체념하는 방법이 있을 수 없고,
2.체념하는 방법이 없으면 1.느끼는 방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1. 앎의 질량이 없으면 2.무한의 복종이 있을 수 없고,
2. 무한의 복종이 없으면 1.앎의 질량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느낌의 정상목적(1)이 없으면, 정상의 느낌목적(2)이 있을 수 없고
정상의 느낌목적(2)이 없으면, 느낌의 정상목적(1)이 아무 의미가 없지요.
번식체 제조목적(1)이 없으면, 번식체 자립목적(2)이 있을 수 없고
번식체 자립목적(2)이 없으면, 번식체 제조목적(1)이 의미가 없지요.
꼭 갚는 식의 구약진리성장이 없으면, 이해와 양보의 신약진리성장이 있을 수 없고
이해와 양보의 신약진리가 없으면, 꼭 갚는 식의 구약진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있을 수 없고
결과가 없으면, 원인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움직임의 원칙 1이 없으면, 움직임의 원칙 2의 순서가 없고
움직임의 원칙 2의 순서가 없으면, 움직임의 원칙 1의 의미가 없지요.
하느님이 없으면, 인간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이 없으면, 하느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동적 무한이 없으면, 정적 무한이 없고
정적 무한이 없으면, 동적 무한이 의미가 없지요.
앎이 없으면, 실천이 생기지 않고
실천이 없으면, 앎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로마서 2장13절, 야고보서 1장22절, 2장14절~22절, 계시록 3장15절)
이거!!! 실천!! 아주 중요하지요.!!! 꼭 실천해야 하는 거예요!!!!.
실천이 없으면 지복이고 뭐고 말짱 꽝!꽝!꽝
앎도 질이 없으면 량이 없고,
량이 없으면 질이 의미가 없잖아요.
불교의 ’상응부경전’ 12장 19절에도 "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연기=緣起)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滅)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고 하여
상대성과 연관성을 피력하였고 이것이 환생설과 인과응보로 인한 윤회설이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