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석가모니의 해탈을 이해 못한 제자
한편,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달을 당시에는 육체가 쇠약해져야만 그에 반비례하여 정신력이 강해진다고 믿었지요.
지금도 이와 같은 이론은 그 지역에서 상식으로 통하고 있어요.
석가모니도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악의악식(惡衣惡食), 단식 등을 했어요.(개체 욕망의 부정을 행하는 과정)
그러나 앎을 깨닫고 나서는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의 생활을 했지요.
그러자 석가모니의 행적을 이해 못한 한 제자가 어느날
"선생님, 깨달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악의악식이 상식인데 어째서 호의호식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지요.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내가 호의호식하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고 대답했대요.
즉, 내가 먹고 입는 것은 욕심이 있어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 가져다주니 그저 생겨서 입고 먹는 것인데(미련과 집착이 없는 상태),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지요.
그 제자요? 떠나갔다는 군요….. 결국 이해하지 못한 거죠.
4.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 불교 사상
그럼 이번에는, 불교사상의 다른 면을 살펴볼까요?
우주엔 '대아=범천=우주혼=우주령'인 심본(心本)이 있고,
대아(大我)에서 소아(小我)인 생명체로 갈려 나타난 것이 곧 갖가지 생물이라는 거죠.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대아(전체성=하느님)의 일부인 소아(개체성=생물들)이기에 나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에요.
또, 소아인 나의 뜻(목적)에 따라 일어나는 움직임을 '업(業)'이라 했으니,
즉, 대아의 쪼가리는 소아이고, 소아의 쪼가리는 업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같은 소아인 다른 생물들을 내가 해치는 것은
상대성(상응부경전 12장 20절 연기緣起)으로 인하여 인과응보를 받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생명체는 죽으면 다시 대아로 돌아가야 하는데
업(개체 미련=목적)이 있으면 업때문에 다시 소아(인간=개체영)로 태어나며,
그 결과 다시 태어날 때에는 업에 의한 인과응보로 환생한다는 윤회설입니다.
이렇듯 인간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四苦=생노병사)은 대아를 떠나 소아로 흩어졌기 때문이니,
한시 바삐 업(목적=집착)을 털어버리고(四諦=고,집,멸,도) 대아(하느님)로 되돌아 가자고,
참선이나 염불을 개발한 거예요.
그렇게 하여,
이렇게 멸을 찾는 것을 '멸도(滅道)'라 하고,
멸은 개체의 지나친 모든 욕망을 잊은 것인즉,
고요하고 편안한 것이라 하여 '적멸(寂滅)'이라고도 한답니다.
적멸은'열반(涅槃)'이라고도 하는데, 열반은 적멸에 든 것이라 하여 '입적(入寂)'이라고도 하지요.
불교 원어에서 열반의 의미는"불이 꺼진 상태" 즉, 개인의 지나친 욕망이 가라앉은 상태를 나타낸 것인데,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상적인 경지라고 생각했던
'아파테이아'의 관념과도 같습니다.
죽음을 열반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후기 불교사상이에요.
불교에서 속세를 '사바세계'라고 하는데, "사바"란 산스크리트어로 "참고 견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열반에 들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어요.
(잡아함경 15장 7절 전법륜, 상응부경전 56장 11절 여래소설, 38장 1절 열반)
1. 정견 = 바른 견해
2. 정사 = 바른 판단
3. 정어 = 바른 말
4. 정업 = 바른 행위
5. 정명 = 바른 생활
6. 정정진 = 바른 노력
7. 정념 = 바른 생각
8. 정정 = 바른 명상
이 팔정도란 중도론이니,
모든 면에 있어서 지나치지 않게 중간 정도로 바른생활(정상=0)을 유지하라는 것이에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도 결국은 같은 뜻이죠.
플라우투스 역시 "만사에 중용이 으뜸이다. 모든 지나침은 인류에게 고통을 가져온다"고 했어요.
이러한 불교는 훗날 승려의 출가문제가 시비되면서 두 가지로 나뉘었으니,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바로 그것이지요.
1). 소승불교 : 동아시아 남쪽의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에 퍼져 있으며,
누구든 부처까지 되기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흘러 다니는 수레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전도방법도 속된 인연을 끊고 석가의 가르침에 따르며,
또한 스스로 깨닫는 것에 일념한다고 해요. 살생은 물론, 결혼과 육식도 금하지요.
2). 대승불교 : 동아시아 북쪽의 중국, 한국, 일본 등에 퍼져 있으며
열반을 그저 마음이 편안한 상태의 유여(有餘)열반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지나 고요하기까지 한 무여(無餘)열반으로 나누고,
또, 나의 본래는 고요와 안정까지도 초월한 우주의 근본 대아(大我)라는 본래자성(本來自性) 열반과 대아(大我)라는 전체성(0)으로서 우주에 충만하기에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없다’는 무주처(無主處) 열반으로 나눕니다.
전도방법도,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에 파묻혀 가르치며, 믿고 실천하여 세상을 밝히는 것이죠.
결국 불교는,
대아(大我=하느님)라는 영계핵의 존재는 깨달았으나
"우주의 존재 이유가 영계핵(大我)의 느끼기 위한 목적에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에요."
이와 같이 우주의 상태만 파악하고, 삶의 목적인 존재의미를 몰랐기에 석가모니는 다 깨닫고 난 후 목적관이 없어 허탈함을 느끼고는
"참으로 존경할 데가 없이 사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떤 사문이나 또는 브라만을 존경하고 의지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일까?" 하고 고민했다는 군요. (상응부경전 6장 2절, 잡아함경 44장 11절 ‘존중편’)
우주의 원칙상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이 완전한 조물주인 하느님을 의지하며 존경하고 살아야 하는데,
의지할 데가 없으니 허탈감(원칙을 벗어난 괴로운 느낌)을 느끼게 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