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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발선비가 세운 남량(南凉)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0     조회 : 286  

독발선비는 걸복씨와 같이 중원 북서쪽, 하서(河西)지역에 근거했던 부족이었다. 이들은 원래 독발씨라고 하는 씨족으로 분류되었으나 점차 씨족민이 늘어가면서 부족으로 탈바꿈 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하서 양주(凉州)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기존에 세력을 이루었던 걸복선비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기 시대를 맞이하여 두 부족은 사이가 점점 멀어졌고 전쟁으로 상대를 정복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어 갔다. 독발선비는 기련산과 언지산에 세력을 확대했으며 이들이 주요 거점인 양주하고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단할 때 독발선비의 세력은 통일된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주에 거점을 가지고 있는 독발선비 세력은 남독발(南禿髮), 기련산과 언지산에 거점을 가지고 있는 독발선비 세력은 북독발(北禿髮)로 불리는데 이들은 독발사복건(禿髪思復鞬)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남북독발을 통일하고 통합된 세력을 중원으로 확대하여 남량(南凉)을 세웠다. 본 단락에서는 독발선비가 중원에 진출해서 남량을 건국하고 활동한 것과 어떻게 쇠퇴하고 멸망하여 소멸되었는지에 대해서 서술할 것이다. 이것은 걸복선비와 마찬가지로 하서지역에 위치한 선비 세력의 존재에 대한 연구로 돌궐이 나타나기 이전의 위구르 지역과 청해성 지역의 활동한 유목민족사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탁발선비, 돌궐로 이어지는 다음 세대의 지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고 돌궐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독발, 걸복선비의 역사 연구에 대한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봉래헌지리총서(蓬萊軒地理叢書)』에는 기련산, 언지산에 거주한 독빌선비와 하서양주에 거주한 독발선비를 북과 남으로 나누어 구분하였고 두 지역을 독발선비의 분리된 세력권으로 기록하였다.; 祁連山,焉支山, 居所農藝, 一個禿髮鮮卑和, 河西涼州, 居主一個, 禿髮鮮卑北南,被分成區分, 地域兩分理, 禿髮鮮卑的, 勢力權. )


386년에 저족(氐族) 여광(呂光)에 의해 후량(後凉)이 건국되고 전량(前凉)의 장씨(張氏)왕가 출신이었던 장대예(張大豫)가 후량에 맞서 난을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독발부의 수장 독발사복건(禿髪思復鞬)은 장대예를 지원하여 후량과 싸웠고 이러한 후량의 내란은 독발선비로 볼 때 중원에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렇게 전란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만약에 실패하게 되면 부족이 쇠퇴할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387년 장대예의 난이 진압되자 독발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부족민 수가 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후량의 추가적인 공격도 우려되고 있었다. 그러나 걸복선비의 서진이 갑자기 세력이 왕성하여 후량을 위협했고 389년 여광이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여 서진과 맞서자 독발선비는 후량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독발선비의 세력을 키워주는 결과가 되었다.


394년에 독발사복건이 죽자 장자 독발오고(禿髮烏孤)가 뒤를 이었는데, 독발오고는 후량에 복속하여 관군대장군·하서선비대도통(冠軍大將軍·河西鮮卑大都統)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서진보다 후량이 더 우세한 전황을 보이고 있고 일단 후량의 예봉을 피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복속이었다.


395년에는 남하하여 청해성의 황수(湟水)유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선비족 을불부(乙弗部), 절굴부(折掘部)를 무너뜨리고 염천보(廉川堡)를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396년에 후량의 여광이 대량천왕(大凉天王)에 즉위하자 독발오고는 이에 반발해 후량의 관직을 받지 않고 독립하였다. 이 때 독립한 독발오고는 새 왕조의 기틀을 염천보로 삼았다.


397년 후량이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금성(金城)을 함락했다.그러나 독발오고가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갑자기 공격하여 금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단업(段業), 저거몽손(沮渠夢遜)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자 후량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후량의 수도인 고장(姑臧)에서 강족의 곽논(郭黁)이 반란을 일으켜 후량은 서진, 후량, 단업, 저거몽손, 강족 등의 공격으로 멸망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부터 독발오고는 남량(南凉)을 건국하였고 하서회랑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단업은 북량(北凉)을 건국하여 양주 지역이 분열되었다.


남량을 건국한 독발오고는 곽논의 봉기에 호응하여 원군을 파견하였으나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그리고 남량과 북량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병력의 손실이 커서 공격하지 못했다.


독발오고는 398년에 서평(西平)지역의 강족 양기(梁饑)를 격파하고 세력을 서평지역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무위왕(武威王)에 등극하여 남량의 전성기를 열었다. 399년에는 수도를 낙도(樂都)로 옮기며 청해성 지역의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 독발오고가 낙마하여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는 후량의 여광이 병으로 태자 여소(呂紹)에게 선위한 후 곧 사망했다. 후량과 남량의 군주가 같은 해에 죽자 북량과 서진이 후량과 남량을 동시에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남량의 경우, 독발오고의 동생인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가 바로 즉위하여 안정을 찾은 반면에 후량은 쿠데타가 일어나 이복형 여찬(呂纂)이 여소를 죽이고 천왕에 즉위했다. 여찬은 남량과 북량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의 공조 체제로 인해 원정에 나서면 후방을 공격당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독발이녹고는 399년 서평(西平)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독발이녹고는 후량과 대립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401년에는 황제를 자칭하려 했으나 황제로 자칭하기에는 세력이 매우 작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서지역을 평정하는 목적으로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 독발이녹고가 서평으로 천도한 이유는 후량, 북량, 서진을 정복하고 서방지역을 완전 장악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후량, 북량, 서진을 위협하는 세력인 요장의 후진(後秦)이 서쪽으로 진출하자 남량은 크게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후진의 이러한 위협에 서진이 멸망하자 남량은 서진의 왕자인 걸복치반 일족이 도망쳐오자 이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서진의 일족들을 흡수하여 걸복선비와 함께 후진에 대항하려는 측면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같은 해 후진(後秦)이 후량을 공격하였는데, 후진의 세력을 두려워한 독발이녹고는 영토인 광무(廣武)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그리고 후진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후진의 군주 였던 요홍이 이를 받아들여 남량은 후진의 복속국이 되었다. 요홍은 독발이녹고에 작위를 주어 광무공(廣武公)에 책봉하고 군을 되돌렸다. 일단 후진의 공격에서 위기를 넘긴 남량은 북량, 후량 등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여 국력을 성장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후진에 다시 대항하기 위해 국력을 모으는 부분도 있었지만 청해성과 감숙성 지역에 맹주가 되는 것이 목표였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독발이녹고의 휘하에 있던 강기(姜紀), 양환(楊桓)등의 장수들은 독발이녹고를 떠나 후진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후량이 후진에 항복하고 후진군이 철수하자 북량(北凉)의 저거몽손은 남량에 복속하려다가 철회했다. 이에 대노한 독발이녹고는 북량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저거몽손의 동생 저거나(沮渠拏)를 인질로 받아 북량을 복속시켰다. 또한 독발녹단(禿髮傉檀)에게 군사를 주어 후량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후량을 제압하고 독발녹단은 후량의 서쪽 영토를 할양받아 철수했다.


403년 독발이녹고가 갑자기 사망하여 동생인 독발녹단(禿髮傉檀)이 즉위했고 독발녹단의 시대부터 남량은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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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선비가 건국한 남량(南凉)의 위치


 
 
TOTAL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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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모용선비의 등장과 모용외 신화
위나라가 모용선비에게 요동을 내주었다는 것은 위나라 입장에서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고 고구려, 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모용선비를 동북지역의 방패막이로 삼아 고구려와 부여를 견제하는 것도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행위에 분노한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면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1
28. 모용선비에 대해 종합적 연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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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59
27. 남량(南凉)의 멸망과 독발선비의 후예, 티베트로 이주하여 토번을 …
독발이녹고 사후, 독발녹단이 즉위하여 남량을 통치했다. 아버지는 독발사복건이고 독발오고(禿髮烏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의 동생이다. 남량은 세습 없이 형제상속으로 제위를 이어갔다. 이것은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의 재능을 높이 사서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였고, 독발오고와 독발이녹고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24
26. 독발선비가 세운 남량(南凉)
독발선비는 걸복씨와 같이 중원 북서쪽, 하서(河西)지역에 근거했던 부족이었다. 이들은 원래 독발씨라고 하는 씨족으로 분류되었으나 점차 씨족민이 늘어가면서 부족으로 탈바꿈 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하서 양주(凉州)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기존에 세력을 이루었던 걸복선비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기 시대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7
25. 걸복선비, 서진(西秦)의 멸망과 마무리
걸복치반의 뒤를 이은 걸복모말(乞伏暮末)은 즉위하자마자 북량의 침입을 받았다. 북량은 끊임없이 서진을 공격했으며 그것은 북쪽의 위협인 서진을 정복해야 북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북량의 침략으로 서진 정권은 영토를 조금씩 잃어갔고 농서 지역과 산서성에 쥐었던 패권마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321
24. 걸복선비의 전성기, 걸복건귀, 걸복치반이 중국 서부 지역의 맹주가…
걸복건귀는 서성(西城)으로 천도하여 세력을 토욕혼 지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저족이 세운 후량(後凉)이 존재했고 오히려 후량의 역습을 받아 대패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후량은 397년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고 서진의 동쪽 국경 지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이 때 패배로 인해 서진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이러한 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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