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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모용선비에 대해 종합적 연구 개요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0     조회 : 259  

모용선비는 고구려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5호 16국 시대에 세워진 선비 국가 중 가장 강한 국가는 탁발선비의 북위이지만 5호의 시대적 구분을 보았을 때 초기와 중기는 모용선비의 전연, 후연 시대, 후기는 탁발선비의 북위 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하북성, 산동성 지역에는 모용선비가 강력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유적들이 발견이 되고 있는데 이에 대표적인 유적인 하북성의 삼연(三燕)문화와 오르도스 지역의 선비 유적을 들 수 있다. 이들 문화권들은 대부분 고분 문화가 중심이며 이러한 고분들을 중심으로 마구와 기타 말 장식 유물, 동복, 제사용 토기, 순장 유구 등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들 유적들의 유물들을 C14와 E.S.R을 공동적으로 측정한 결과 4~5세기 유물로 대거 측정되어 시대적 정황상 모용선비의 유물로 보이며 당시 모용선비의 생활 풍속이나 장례, 종교적 관습과 문화적인 부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유물에 해당한다.


모용선비의 유적이 발굴되기 이전에는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의 쿠르간에서 나타난 형태의 목곽분과 순장 풍습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흉노의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으며 일본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동아시아에 발견되는 중앙아시아식 쿠르간은 일찍이 흉노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목곽분들은 모두 흉노의 유적이라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대측정 결과 흉노가 동아시아에서 사라진 다음이라는 것과 문헌 사료로 검토하였을 때 고구려와 연계성이 강했다는 점, 그리고 기존의 흉노와는 다른 목곽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도 해당 지역에 모용선비의 존재 여부도 확실하여 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선동 유적이 발굴되자 삼연문화와 오르도스 지역의 후기 목곽분 등이 모용선비의 유적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흉노의 유적으로 규정했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흉노 유적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추가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 있으며 모용선비의 이동 경로에 대한 가설들이 성립되었으나 해당 가설들에 대한 인류학적, 고고학적 근거의 취약점은 문헌학적의 가설 근거들의 입지를 좁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부분에 있어 확실한 고증으로 보이는 모용선비의 유적은 모용선비가 어디에서 이동하여 남하하였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한계가 뚜렷하여 문헌 사료적 접근으로만 추론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과학적인 데이터가 아닌 역시 접근성이 쉬운 문헌사료학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그것은 모용선비의 통사(通史)를 서술하고 또한 문헌사료학적인 부분에 있어 아직 모용선비사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갖춰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료적으로 검토해볼 때 모용선비는 중국사 입장에서 서술된 부분이 많았고 주로 고구려, 부여와의 전쟁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통사를 이해하는 부분이 아직 미흡하여 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다.


본 연구는 중국이 아닌 한민족사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연구를 지양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고 흔히 보았던 모용선비에 대한 선입견을 환기하는 긍정적인 부분에서 첫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를 바탕으로 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다른 입장에서의 연구가 집대성 되어 다양한 학설로 인한 발전적 방향을 모색하였으면 한다.


1. 모용선비와 중원, 부여,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전연(前燕)사 검토


부여, 고구려사에서 모용선비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시기는 고구려는 동천왕(東川王 227년~248년), 중원에는 위(魏), 촉(蜀), 오(吳)가 다투는 삼국시대의 절정기였다. 당시 위나라가 강성했던 시기로 모용선비는 섭귀(涉歸)가 대인이 되어 통치하였고 모용선비는 위나라에 종속되어 있었다. *


* 董萬侖,『동북사강요(東北史綱要)』,第 二十, <慕容廆>에서는 위나라에 종속된 모용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용선비(慕容鮮卑)의 수령 막호발(莫護跋)은 단석괴(檀石槐)의 부락연맹에 들어가 중부대인(中部大人)으로 되었다. 조위(曹魏) 초에, 막호발(莫護跋)은 부중을 이끌고 요수(遼水)의 서쪽으로 옮겨 가 살았으며, 사마의(司馬懿)를 따라 공손연(公孫淵)을 정벌한 공적으로 솔의왕(率義王)이 되었다. 그의 아들 목연(木延)은 관구검을 따라 고구려를 정벌한 공적으로 대도독(大都督)·좌현왕(左賢王)으로 존호가 더해졌다. 그의 아들 섭귀(涉歸)는 유성(柳城)(지금의 '朝陽南'이다)을 보위한 공적으로, 선비선우(鮮卑單于)에 진배(進拜)되었고, 그 뒤에 진(晉)나라에 반하였다가 토파(討破)되었다. 慕容鮮卑首領, 莫護跋的, 檀石槐入部絡盟蓮, 成為中部大人。在曹魏初,莫護跋, 部眾帶領遼, 水西走向短命的, 舉動,司馬懿公孫淵, 以及一個功的, 定伐成為, 了率義王。木延他的, 兒子沿毋丘儉, 以高句麗功的, 定伐的一個, 大都督·左賢王, 成為尊呼。保衛涉歸柳城一功的,鮮卑單于, 進拜上,其次是反, 晉國家是他的, 兒子討破。)


모용섭귀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고구려, 위나라 연합군이 공손씨와 격전을 벌일 때 위나라의 보급로인 유성(柳城)을 지키며 고구려와 위나라 군의 병참기지를 수호한 공적이 있었다. 그러한 공적 덕택에 위나라에서는 모용섭귀에게 요동태수의 지위를 주고 읍락을 이주하도록 하였다. 그때부터 모용선비는 요동으로 이주하였고 평소 요동을 노리던 고구려와 인접하게 되니 모용선비와 고구려와의 사이가 급속도로 악화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고구려와 위나라가 동맹하여 공손씨를 토벌한 것은 위나라 입장에서 촉과 오와 남쪽에서 국경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북쪽의 흉노 일족인 공손씨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었다. 반면 고구려는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요동을 얻고 싶어 했다. 결국 해당 원정은 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는 요동을 고구려에 넘겨주면 고구려가 중원으로 진출하여 위나라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심리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나라는 고구려에 요동 반환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요동을 노리려고 한 나라는 고구려만이 아니었다. 부여도 요동을 노리고 있었다. 부여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요동을 발판으로 하여 하북성과 산동성을 통해 중원으로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동의 위치를 다시 검토해 보았을 때 동북지방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자 화북 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고구려와 부여가 요동을 지배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요동이 단군조선의 중심 강역이었고 이를 다시 되찾기 위한 것도 분명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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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선비 씨족의 거두 모용외


 
 
TOTAL 170
44. 전연의 전성기와 모용각의 활약
353년 동진의 영삭장군(寧朔將軍) 영호(榮胡)가 팽성(彭城)과 노군(魯郡)을 들어 동진에 반역하고 모용준에게 항복했다. 모용준은 이를 받아들여 팽성태수로 봉하여 변경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상산(常山) 사람인 이독(李犢)이 수천명 무리를 모아 보벽루(普壁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이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74
43. 모용준,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다.
352년 단 선비의 단근(段勤)이 당초 모용준에게 귀부했었다가 그 뒤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과 상국(相國) 봉혁(封弈)을 보내 안희(安喜)에서 염민(冉閔)을 치고, 모용수(慕容垂)는 역막(繹幕)에서 단근(段勤)을 치고, 모용준은 중산(中山)으로 가서 모용각과 봉혁의 군대를 위하여 미리 주둔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24
42. 모용준의 즉위와 염민, 염위의 멸망
모용준(慕容儁)은 자(字)가 선영(宣英)이고 모용황(慕容皝)의 차남이다. 당초 모용준의 조부인 모용외(慕容廆)가 늘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가 복(福)과 인(仁)을 쌓았으니 내 자손이 마땅히 중원(中原)을 차지할 것이다.” 얼마 뒤에 모용준을 낳자 모용외가 말했다, “이 아이의 골상(骨相)이 범상치 않으니 우리 가문이 마땅한 후계…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41
41. 전연, 부여와의 전쟁과 모용황의 죽음
모용황은 학문적인 부분과 인재 양성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이는 초기의 과거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용황은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으로 대신(大臣)의 자제(子弟)들 중 관학생(官學生)이 된 자에게 고문생(高門生)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리고 학문의 진흥을 위해 옛 궁에 학교를 세워 활을 쏘고 수련하면서 공부 하는 곳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05
40. 동진(東晉) 조정, 모용황의 전연을 북방의 패자로 인정하다.
343년 전연은 우문귀(宇文歸)가 국상(國相) 막천혼(莫淺渾)을 보내 모용황을 공격하니 제장들이 맞서 싸울 것을 청했으나 모용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막천혼은 모용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겨 전혀 방비하지 않았다. 이 때 모용황은 모용한(慕容翰)과 기병들을 보내 막천혼의 군사들을 치게 하니 막천혼(莫淺渾)이 대패하여 혼자 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28
39. 모용황과 고구려의 전쟁 - 고구려의 치욕
339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에 이르렀다. 전연의 군대가 막강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화의를 청하자 다시 회군하여 돌아왔다. 340년에는 고국원왕이 태자를 모용황에게 보내 입조하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故國原王> [본문] 九年, 燕王皝來侵, 兵及新城…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13
38. 모용황, 단 선비 - 후조(後趙) 석계룡과의 전쟁
모용황은 단요(段遼)가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자 장군 송회(宋回)를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보내 함께 단요를 공격할 군대를 요청했다. 이에 석계룡이 군대를 총괄하여 진격하고, 모용황도 군사를 이끌고 단요의 도읍인 영지(令支) 이북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다. 단요가 장수 단란(段蘭)을 보내 항거하니 이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52
37. 모용황의 모용인, 단 선비 공략과 전연 (前燕)의 건국
모용황이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많은 신하들이 간언하며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뭍길(陸路)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용황이 말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31
36. 모용황의 요동 경략
평주 요동국 양평현의 현령 왕빙(王冰), 장군 손기(孫機)가 요동(遼東)으로써 모용황에게 반기를 드니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 호군(護軍) 을일(乙逸), 요동상(遼東相)* 한교(韓矯), 현도태수(玄菟太守) 고후(高詡)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이들은 모용황에게 돌아갔다. * 요동상(遼東相)은 요동국의 상相. 모용외가 요동공…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714
35. 모용인의 반란과 모용황의 토벌
333년 5월에 모용황이 요동공의 지위를 이었고 평북장군(平北將軍) 대행이자 평주자사(平州刺史)가 되어 부(部) 내부를 장악했다. 같은 해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가 그의 별부(別部) 일두귀(逸豆歸)에 의해 축출되어 도망치다가 객사했다. 이에 모용황은 일두귀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여 본격적으로 거병하였다. 모용황이 기병…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13
34. 모용외의 중원 공략과 모용황의 등장
배억(裴嶷)이 건업(建鄴)으로부터 돌아올 때 동진에서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감평주제군사(監平州諸軍事), 안북장군(安北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임명하고 식읍을 2천 호(戶) 늘려주었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 사신을 보내 사지절(使持節), 도독유주동이제군사(都督幽州東夷諸軍事), 거기장군(車騎將軍), 평주목(平州牧…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19
33. 고구려의 요동 침공과 모용외의 대응
모용외의 차남인 모용황(慕容皝)이 각 제후들과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속수(束脩)하여 수업(受業)하고 모용외가 정무를 보다 틈이 있으면 친히 유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렇게 모용외가 다스리는 요동지역은 비교적 평안했으며 학문으로는 유학적인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34
32. 고구려의 미천왕과 모용외, 모용선비의 완전한 하북성 정착
309년, 고구려 미천왕은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함락시키고, 315년에는 현도성(玄菟城)을 함락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七,「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五, <美川王> [본문]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중략)...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5
31. 모용외와 고구려의 격돌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입 이후 동산(東山)에서 재기하여, 현도(玄菟) · 요동(遼東)을 다시 침략하였다. 무제 때에 소요수(小遼水)로 침입하여, 신성(新城)을 점령하였고, 또 대량수(大梁水)상류로 침입하여, 양맥(梁貊)을 통치하였다. 294년에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자, 신성(新城)의 재북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43
30. 모용선비와 부여의 전쟁
모용외는 우문선비를 공격하여 제압하기 위해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으나 진나라의 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외는 이에 분노하여 우문선비를 제압하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낙양으로 향하는 지역인 요서(遼西)를 침입하여 여러 성들을 약탈하고 진나라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67
29. 모용선비의 등장과 모용외 신화
위나라가 모용선비에게 요동을 내주었다는 것은 위나라 입장에서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고 고구려, 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모용선비를 동북지역의 방패막이로 삼아 고구려와 부여를 견제하는 것도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행위에 분노한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면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1
28. 모용선비에 대해 종합적 연구 개요
모용선비는 고구려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5호 16국 시대에 세워진 선비 국가 중 가장 강한 국가는 탁발선비의 북위이지만 5호의 시대적 구분을 보았을 때 초기와 중기는 모용선비의 전연, 후연 시대, 후기는 탁발선비의 북위 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하북성, 산동성 지역에는 모용선비가 강력한 국가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60
27. 남량(南凉)의 멸망과 독발선비의 후예, 티베트로 이주하여 토번을 …
독발이녹고 사후, 독발녹단이 즉위하여 남량을 통치했다. 아버지는 독발사복건이고 독발오고(禿髮烏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의 동생이다. 남량은 세습 없이 형제상속으로 제위를 이어갔다. 이것은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의 재능을 높이 사서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였고, 독발오고와 독발이녹고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24
26. 독발선비가 세운 남량(南凉)
독발선비는 걸복씨와 같이 중원 북서쪽, 하서(河西)지역에 근거했던 부족이었다. 이들은 원래 독발씨라고 하는 씨족으로 분류되었으나 점차 씨족민이 늘어가면서 부족으로 탈바꿈 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하서 양주(凉州)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기존에 세력을 이루었던 걸복선비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기 시대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7
25. 걸복선비, 서진(西秦)의 멸망과 마무리
걸복치반의 뒤를 이은 걸복모말(乞伏暮末)은 즉위하자마자 북량의 침입을 받았다. 북량은 끊임없이 서진을 공격했으며 그것은 북쪽의 위협인 서진을 정복해야 북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북량의 침략으로 서진 정권은 영토를 조금씩 잃어갔고 농서 지역과 산서성에 쥐었던 패권마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321
24. 걸복선비의 전성기, 걸복건귀, 걸복치반이 중국 서부 지역의 맹주가…
걸복건귀는 서성(西城)으로 천도하여 세력을 토욕혼 지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저족이 세운 후량(後凉)이 존재했고 오히려 후량의 역습을 받아 대패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후량은 397년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고 서진의 동쪽 국경 지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이 때 패배로 인해 서진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이러한 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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