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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황, 단 선비 - 후조(後趙) 석계룡과의 전쟁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2     조회 : 352  

모용황은 단요(段遼)가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자 장군 송회(宋回)를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보내 함께 단요를 공격할 군대를 요청했다. 이에 석계룡이 군대를 총괄하여 진격하고, 모용황도 군사를 이끌고 단요의 도읍인 영지(令支) 이북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다. 단요가 장수 단란(段蘭)을 보내 항거하니 이를 격파하고 수 천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5천여 호(戶)를 약탈하고는 돌아왔다. 석계룡이 서무(徐無)에 이르자 단요는 밀운산(密雲山)으로 도주했다.


* 석계룡(石季龍)은 원래 이름이 석호(石虎)이고 자(字)는 계룡(季龍)이다.『진서(晉書)』는 당나라 때 쓰여진 책이라 피휘 하기 위해 이름이 아닌 자(字)로 표기하고 있다.* 석륵의 조카인데, 333년에 석륵이 죽고 석륵의 아들인 석홍(石弘)이 즉위하자 334년에 그를 몰아내고 후조의 정권을 차지하였다.


 * 당 고조 이연의 조부인 虎를 피휘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같은 예로 공손연-공손문의, 유연-유원해 등의 표기가 있다.


석계룡이 진격하여 영지(令支)로 들어오자 모용황이 약속을 어기고 석계룡의 군대와 합류하지 않았음에 분노했다. 그런 상황에서 단요를 토벌하고 전연의 영토로 진군하여 모용황을 공격하기 위해 극성(棘城)에 이르렀다. 기마병 수십만으로 사면(四面)에서 공격하니 군현(郡縣)이나 여러 부(部) 중에서 모용황을 배신하고 석계룡에 호응한 자가 36개 성(城)에 이르렀다. 극성에서 서로 대치한 지 열흘 이상 지나자 좌우(左右)의 수하들이 모용황에게 항복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모용황은 이를 거절하고는 차남인 모용각(慕容恪)등의 장수들을 보내 기병 2천을 이끌고 석계룡 군을 야습하게 하였다. 석계룡의 군사들이 이에 놀라 갑옷을 버리고 도주했다. 모용각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3만여 명을 참수하였고, 국경지대에 범성(凡城)을 쌓아 수비병을 두었다. 그리고 부장을 시켜 범성을 수비하게 하고는 돌아왔다.


단요(段遼)가 석계룡에게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군사를 내어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석계룡이 장수 마추(麻秋)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단요를 지원하게 하니, 모용각이 정예기병 7천을 밀운산(密雲山)에 복병으로 두어 이를 대파하고 그의 사마(司馬) 양유(陽裕), 장군 선우량(鮮于亮)등을 사로잡고 단요(段遼)와 부장들 역시 사로잡아 돌아왔다.*


* 『진서(晉書)』, 卷 七 「成帝紀」第一 [본문]四年春二月, 石季龍帥衆七萬, 擊段遼于遼西, 遼奔于平崗. 夏四月, 李壽弒李期, 僭卽僞位, 國號漢. 石季龍爲慕容皝所敗, 癸丑, 加皝征北大將軍. ; 함강 4년 봄 2월, 석계룡(石季龍)이 군사 7만을 거느리고 요서에서 단요(段遼)를 공격하니 단요가 평강(平崗)으로 달아났다. 여름 4월, 이수(李壽)가 이기(李期)를 시해하고 참람되이 거짓 지위에 오르고는 국호를 한(漢)이라 했다.* 석계룡이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했다. 계축일, 모용황에게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을 더했다.


 * 저족이 촉 지방에 세운 성한(成漢)을 말한다.


석계룡의 장수 석성(石成) 등이 요서(遼西)를 공격해오자 모용황의 전군사(前軍帥) 모용평(慕容評)이 이를 격파하고 석성을 추격하여 부장인 호연황(呼延晃), 장지(張支)를 죽이고 1천여 호(戶)를 탈취한 뒤에 돌아왔다. 단요(段遼)가 모반하자 모용황이 그를 주살했다.석계룡이 석성(石成)을 시켜 범성(凡城)을 공격하게 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진격하여 광성(廣城)을 함락했다. 이것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석성은 광성에서 철수했다. 화북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모용황과 석계룡의 전쟁은 계속 되었다.* 전연과 후조 두 강대국의 전쟁은 주변에 있는 다른 소국(小國)들의 세력을 신장시켜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고 전연과 후조, 두 나라도 거듭된 전쟁으로 점점 군사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주변국들이 득세함에 따라 후조는 남쪽과 서쪽의 세력들을 제압해야 했었고 전연은 동북쪽의 부여와 고구려가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 경우, 요동과 요서지역을 단 선비, 우문선비의 잔존 세력들을 통해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 『진서(晉書)』「成帝紀」에서는 “함강 6년(340년) 2월, 모용황과 석계룡의 장수 석성(石成)이 요서에서 싸워 모용황이 이를 격파하고 전리품을 경사(京師)로 보내 바쳤다.” (二月, 慕容皝及石季龍將石成戰于遼西, 敗之, 獻捷于京師.)고 하고, 함강 7년(341년) 2월 기묘일에 모용황의 연왕 임명 요구를 허락하였다고 했는데(七年春二月甲子朔, 日有蝕之. 己卯, 慕容皝遣使求假燕王章璽, 許之.) 함강 5년(339년) 겨울에 보낸 모용황의 사자인 유상 등이 건업에 도착한 시점이 함강 6년(340년) 2월이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진서(晉書)』「成帝紀」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은 모용황의 자립성과는 떨어진 책봉의식에 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인들의 춘추필법으로 인한 기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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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속의 모용황의 전연과 석계룡의 후조와의 전쟁

 

 

 

 
 
TOTAL 170
44. 전연의 전성기와 모용각의 활약
353년 동진의 영삭장군(寧朔將軍) 영호(榮胡)가 팽성(彭城)과 노군(魯郡)을 들어 동진에 반역하고 모용준에게 항복했다. 모용준은 이를 받아들여 팽성태수로 봉하여 변경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상산(常山) 사람인 이독(李犢)이 수천명 무리를 모아 보벽루(普壁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이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74
43. 모용준,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다.
352년 단 선비의 단근(段勤)이 당초 모용준에게 귀부했었다가 그 뒤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과 상국(相國) 봉혁(封弈)을 보내 안희(安喜)에서 염민(冉閔)을 치고, 모용수(慕容垂)는 역막(繹幕)에서 단근(段勤)을 치고, 모용준은 중산(中山)으로 가서 모용각과 봉혁의 군대를 위하여 미리 주둔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24
42. 모용준의 즉위와 염민, 염위의 멸망
모용준(慕容儁)은 자(字)가 선영(宣英)이고 모용황(慕容皝)의 차남이다. 당초 모용준의 조부인 모용외(慕容廆)가 늘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가 복(福)과 인(仁)을 쌓았으니 내 자손이 마땅히 중원(中原)을 차지할 것이다.” 얼마 뒤에 모용준을 낳자 모용외가 말했다, “이 아이의 골상(骨相)이 범상치 않으니 우리 가문이 마땅한 후계…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41
41. 전연, 부여와의 전쟁과 모용황의 죽음
모용황은 학문적인 부분과 인재 양성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이는 초기의 과거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용황은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으로 대신(大臣)의 자제(子弟)들 중 관학생(官學生)이 된 자에게 고문생(高門生)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리고 학문의 진흥을 위해 옛 궁에 학교를 세워 활을 쏘고 수련하면서 공부 하는 곳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05
40. 동진(東晉) 조정, 모용황의 전연을 북방의 패자로 인정하다.
343년 전연은 우문귀(宇文歸)가 국상(國相) 막천혼(莫淺渾)을 보내 모용황을 공격하니 제장들이 맞서 싸울 것을 청했으나 모용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막천혼은 모용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겨 전혀 방비하지 않았다. 이 때 모용황은 모용한(慕容翰)과 기병들을 보내 막천혼의 군사들을 치게 하니 막천혼(莫淺渾)이 대패하여 혼자 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28
39. 모용황과 고구려의 전쟁 - 고구려의 치욕
339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에 이르렀다. 전연의 군대가 막강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화의를 청하자 다시 회군하여 돌아왔다. 340년에는 고국원왕이 태자를 모용황에게 보내 입조하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故國原王> [본문] 九年, 燕王皝來侵, 兵及新城…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13
38. 모용황, 단 선비 - 후조(後趙) 석계룡과의 전쟁
모용황은 단요(段遼)가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자 장군 송회(宋回)를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보내 함께 단요를 공격할 군대를 요청했다. 이에 석계룡이 군대를 총괄하여 진격하고, 모용황도 군사를 이끌고 단요의 도읍인 영지(令支) 이북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다. 단요가 장수 단란(段蘭)을 보내 항거하니 이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53
37. 모용황의 모용인, 단 선비 공략과 전연 (前燕)의 건국
모용황이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많은 신하들이 간언하며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뭍길(陸路)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용황이 말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31
36. 모용황의 요동 경략
평주 요동국 양평현의 현령 왕빙(王冰), 장군 손기(孫機)가 요동(遼東)으로써 모용황에게 반기를 드니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 호군(護軍) 을일(乙逸), 요동상(遼東相)* 한교(韓矯), 현도태수(玄菟太守) 고후(高詡)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이들은 모용황에게 돌아갔다. * 요동상(遼東相)은 요동국의 상相. 모용외가 요동공…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714
35. 모용인의 반란과 모용황의 토벌
333년 5월에 모용황이 요동공의 지위를 이었고 평북장군(平北將軍) 대행이자 평주자사(平州刺史)가 되어 부(部) 내부를 장악했다. 같은 해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가 그의 별부(別部) 일두귀(逸豆歸)에 의해 축출되어 도망치다가 객사했다. 이에 모용황은 일두귀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여 본격적으로 거병하였다. 모용황이 기병…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13
34. 모용외의 중원 공략과 모용황의 등장
배억(裴嶷)이 건업(建鄴)으로부터 돌아올 때 동진에서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감평주제군사(監平州諸軍事), 안북장군(安北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임명하고 식읍을 2천 호(戶) 늘려주었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 사신을 보내 사지절(使持節), 도독유주동이제군사(都督幽州東夷諸軍事), 거기장군(車騎將軍), 평주목(平州牧…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19
33. 고구려의 요동 침공과 모용외의 대응
모용외의 차남인 모용황(慕容皝)이 각 제후들과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속수(束脩)하여 수업(受業)하고 모용외가 정무를 보다 틈이 있으면 친히 유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렇게 모용외가 다스리는 요동지역은 비교적 평안했으며 학문으로는 유학적인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34
32. 고구려의 미천왕과 모용외, 모용선비의 완전한 하북성 정착
309년, 고구려 미천왕은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함락시키고, 315년에는 현도성(玄菟城)을 함락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七,「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五, <美川王> [본문]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중략)...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6
31. 모용외와 고구려의 격돌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입 이후 동산(東山)에서 재기하여, 현도(玄菟) · 요동(遼東)을 다시 침략하였다. 무제 때에 소요수(小遼水)로 침입하여, 신성(新城)을 점령하였고, 또 대량수(大梁水)상류로 침입하여, 양맥(梁貊)을 통치하였다. 294년에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자, 신성(新城)의 재북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43
30. 모용선비와 부여의 전쟁
모용외는 우문선비를 공격하여 제압하기 위해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으나 진나라의 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외는 이에 분노하여 우문선비를 제압하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낙양으로 향하는 지역인 요서(遼西)를 침입하여 여러 성들을 약탈하고 진나라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67
29. 모용선비의 등장과 모용외 신화
위나라가 모용선비에게 요동을 내주었다는 것은 위나라 입장에서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고 고구려, 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모용선비를 동북지역의 방패막이로 삼아 고구려와 부여를 견제하는 것도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행위에 분노한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면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1
28. 모용선비에 대해 종합적 연구 개요
모용선비는 고구려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5호 16국 시대에 세워진 선비 국가 중 가장 강한 국가는 탁발선비의 북위이지만 5호의 시대적 구분을 보았을 때 초기와 중기는 모용선비의 전연, 후연 시대, 후기는 탁발선비의 북위 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하북성, 산동성 지역에는 모용선비가 강력한 국가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60
27. 남량(南凉)의 멸망과 독발선비의 후예, 티베트로 이주하여 토번을 …
독발이녹고 사후, 독발녹단이 즉위하여 남량을 통치했다. 아버지는 독발사복건이고 독발오고(禿髮烏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의 동생이다. 남량은 세습 없이 형제상속으로 제위를 이어갔다. 이것은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의 재능을 높이 사서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였고, 독발오고와 독발이녹고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24
26. 독발선비가 세운 남량(南凉)
독발선비는 걸복씨와 같이 중원 북서쪽, 하서(河西)지역에 근거했던 부족이었다. 이들은 원래 독발씨라고 하는 씨족으로 분류되었으나 점차 씨족민이 늘어가면서 부족으로 탈바꿈 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하서 양주(凉州)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기존에 세력을 이루었던 걸복선비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기 시대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287
25. 걸복선비, 서진(西秦)의 멸망과 마무리
걸복치반의 뒤를 이은 걸복모말(乞伏暮末)은 즉위하자마자 북량의 침입을 받았다. 북량은 끊임없이 서진을 공격했으며 그것은 북쪽의 위협인 서진을 정복해야 북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북량의 침략으로 서진 정권은 영토를 조금씩 잃어갔고 농서 지역과 산서성에 쥐었던 패권마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321
24. 걸복선비의 전성기, 걸복건귀, 걸복치반이 중국 서부 지역의 맹주가…
걸복건귀는 서성(西城)으로 천도하여 세력을 토욕혼 지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저족이 세운 후량(後凉)이 존재했고 오히려 후량의 역습을 받아 대패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후량은 397년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고 서진의 동쪽 국경 지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이 때 패배로 인해 서진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이러한 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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