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義士(1879~1910)의 친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글인데
원래 論語 憲問篇에 실려 있습니다.
완성된 인간(成人)은 어떤 사람이냐고
子路가 孔子에게 묻자
공자는 먼저 옛 성인의 조건을 나열합니다.
장무중의 지혜로움, 맹공작의 욕심없음,
변장자의 용기, 염구의 藝에다가
禮樂을 겸하면 가히 성인이라 할만하다고 답합니다..
이어서 공자는 작금 성인의 조건을 다시 이야기하는데
제목에 있는 글이 여기서 나옵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옛사람처럼 知, 仁, 勇, 藝, 禮樂...등을 두루 갖추지 못했더라도
이득앞에 섰을 때
이것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를 생각할 줄 안다면.......
위험에 처한 사람이나 위태한 민족과 나라의 모습을 보고
제 목숨을 바쳐 구할 줄을 알다면....
成人이라 할만하다고 말합니다.
論語, 述而篇에도 관련되는 구절이 있는데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의롭지 못하게 얻은 부귀는 뜬구름과 같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 선비들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모든 소소한 사건과 일상까지
이런 “의로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며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평생을 아름답게 살다 간 청빈한 선비가 있을 수 있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언할 줄 아는 충성스런 신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을 짜먹기만 하던 부패한 조선조 양반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부처 요직에 추천된 장관급 인사들의 청문회를 접하면서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의 비도덕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을 보며
옛 선비들의 고결하고 깨끗한 삶이 새삼 그리웠습니다.
잠시잠깐의 이익을 얻고 조그마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양심을 거스르고
의롭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결국 그 과보는 자기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공자가 태묘에 들어가니
모든 것을 일일이 물어보고 행하였다 했습니다.
子入大廟, 每事問. (論語 八佾篇)
古今의 예절에 통달한 孔子가 몰라서 물어 본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올바름이란
돌다리도 다시 두드려보고 걷듯이 조심스럽고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하던 내 말과 행동을 재삼 재사 돌아보고 그 중에 올바르지 못한 것들은 없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子貢이 孔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으니
먹는 문제, 안전 문제 외에 “백성의 믿음”을 거론했습니다..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論語 顔淵)
내가 사는 일상생활중에 나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거짓말이나
불성실한 언행이 있지는 않았는지 항상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어진이가 그 홀로 있음을 삼가하는 것과 같이
君子必愼其獨也 (大學)
그 누구보다 자기자신에게 먼저 진실하여야 합니다.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大學)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자신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자신까지도 속여서 제가 잘못을 하는지 아닌지도 구분을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그 사람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게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신을 먼저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孟子, 離婁章句上)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란
어떤 고매한 이론이나 학설 내지 수십년에 이르는 수도생활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말하고 그대로만 행동하면 됩니다.
진실앞에 세웠을 때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당당하게 대면할 수 있는 인생,
자기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라면 족한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자기자신에게조차 부끄러운 인생이라면 결코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見利思義는,
"개체"끼리의 부딪힘속에서 옳고 그름의 비중을 판단하여 "전체"를 찾아내는 것이며,
見危授命은,
"개체"가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되는 "전체"를 위하여 아낌없이 헌신함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