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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5     조회 : 434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이 대표적이다.


북위는 사회적으로 호족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화북을 통일한 북위의 귀족층들이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유학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유학을 장려한 지식인 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재력도 겸비했을 뿐 아니라 향리에서 덕망을 배경으로 하여 향리의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당시 이들 귀족들은 망족(望族), 혹은 군망(郡望)으로 불리었는데 망이란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귀족과 백성들의 상호 작용을 맺은 것에서 유래한 용어로 보인다. 군망(郡望)이란 한나라 이후로 주(州)가 최고 행정구획이 되면서 군(郡)은 하나의 지역사회의 성립 단위로 형성하였다.


그러한 부분에 있어 당시의 지배 계급들은 군(郡) 단위에서 지역 향리를 중심으로 한 자립적 세계가 형성된 것에서 비롯되었고 이들은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중앙에 진출했다. 중앙에 진출하면서 학문적 소양의 문화가 융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궁중 문화로 도출되어 왕실의 중요 문화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불교의 경우는 민간 의식 차원 중 하나로 보았는데 후일 북위 말기에 불교가 왕실 문화로 흡수되면서 유학과 종교가 융합한 체제의 문화로 나타났다.


이들 귀족문화는 북위의 도무제(道武帝)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도무제는 중앙집권적인 지형이 강한 인물이었고 여러 제도나 인재 발탁에 있어서도 이러한 부분이 확고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도무제 시기의 사회와 문화는 도무제를 중심으로 한 요소가 부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무제의 아들 명원제(明元帝)는 귀족계층과 국가권력의 결합을 도모하면서 귀족 중심의 문화를 형성하려 하였고 이를 태무제(太武帝)시기에 이를 완성하였다.당시의 지식인들은 유교적 교양과 덕행을 쌓아 지방관의 추천을 받은 뒤 중앙정부에 의해 관리로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전연에서 과거 제도와 유사한 공과로 인한 관리 채용이 들어갔고 이를 기점으로 추천제에서 시험제로 관리 채용이 변환되었다. 그러나 북위에서는 이러한 공과제도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려 하는 부분에서 같은 북방계 유목민족들이 관리가 되지 못하여 불만을 갖는 사태가 연이어 벌어지자 태무제 시기에 공과제도를 폐지하고 다시 관료 추천제로 돌아갔다. (『위서(魏書)』, 卷 四,「世祖紀」, 第 四, [본문] 燕, 公科制度, 適用嘗試接受的, 那部分北方系, 游牧民族, 官理不會陸續投, 訴的, 情況時太武帝的。公科制度,並再次回到, 官僚推薦制。)


추천제의 경우는 시험을 통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추천자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곧 부정부패로 이어지곤 했다. 그리고 지방호족 출신들이 중정관을 차지하면서 호족의 자제들이나 그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고위관리가 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이 세기에 걸쳐 계속되면 관리를 제출한 집안만 계속해서 관리를 배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고위관리를 계속해서 배출한 명문(名門), 명족(名族)과 그렇지 못한 한문(寒門)이 고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관리의 신분이 세습화 되고 귀족화 되면서 이 시기에는 문화와 사상 전반에 걸쳐 문벌귀족들의 귀족 사회와 귀족 문화가 펼쳐지게 되었다. *


*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고 한다.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의 관리 선발제도이다. 한(漢)대의 향거리 선제에 대신해서 위(魏) 문제(文帝) 황초(黃初) 원년(220년)에 처음 실시되었으며 이후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과거제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계속 시행되었다. 군에는 소중정이 있어 언행이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주의 대중정에게 보내고, 대중정이 이를 다시 살펴 중앙의 사도에게 추천하면 사도가 이들을 평가한 후 상서에게 올려 임용하는 방식인데, 이 때 중정관은 대상자를 평소 관찰한 바의 언행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추천하였다. 이는 찰거제(察擧制)의 한 형태로 이 시기 교양(敎養)의 본질이 행동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정관은 보통 그 지방의 유력 문벌이 장악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가문의 고하가 추천등급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어 상위의 3품은 문벌 출신이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선발된 자들에게 각종의 고시를 가하여 공정성을 기하려 하였으나 제도의 성격상 추천 자체가 이미 문벌 위주로 이루어진 이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계는 과거제에 의해 극복되었다.


북위의 경우도 그렇지만 남조의 송나라 역시 막강한 재력과 권세를 지닌 문벌귀족들에 의해 출세가 결정되는데 문벌귀족들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그렇지 못한 한문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들의 특권은 잇달아 세습되었고 상호간의 폐쇄적인 혼인관계로 인해 더욱 밀착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와 같은 고착화 현상은 수나라에 의해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해결되었다. 특히 수나라의 경우, 수 문제가 이러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수서(隋書)』, 卷 二十二,「裵矩傳」, 第 二十. [본문] 官僚推薦制, 讓我們的, 不正腐敗, 文帝, 蔓延的, 官僚推薦制的, 科舉制度,再實施改革。)


지배계층인 호족들의 관료제 세습화가 진행되는 시기적 배경에는 5호의 화북 진출과 한족의 남조 이동이었다. 그리고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고 정치사회의 유동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다양화되고 더욱 고착화되었다. 5호 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지배계층은 북방민족인 호족들이다. 호족들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북위 시대에 대토지 소유자 및 상업 자본가들로 성장하였으나 계속되는 전란으로 인하여 토지가 황폐해지고 농민들의 생활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그렇게 궁핍한 농민들이 호족들의 장원으로 들어와 예속 농민과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호족들이 전성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효문제 시기에는 서진(西晋)의 점전법(占田法)*을 좀 더 체계화 시킨 균전법(均田法)을 실행하였다. 균전제는 토지 국유를 조건으로 하여 경지 분배를 단행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식의 토지제도였다.


* 점전법(占田法)은 중국 진(晉)나라의 무제(武帝)가 오(吳)나라를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직후에 발포한 토지제도이다. 위(魏)나라 말 진나라 초기에 위나라의 관둔전(官屯田)이 폐지되고 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진나라 구래의 관둔전과 평정되기 전의 오나라의 군둔전 및 민둔전 등이 폐지되었다. 283년의 서진의 호수는 377만이었는데, 그 반수가 이런 둔전 경작자로 통일이 된 후에는 일반 서민호로 편입되었다. 또한 군현(郡縣)의 지배하에 들어간 둔전지는 전국적으로 존재하였다. 점전법과 과전법은 이러한 둔전제도의 개폐기에 발포된 것인데, 점전법은 구래의 호(관인 및 서민의)를 대상으로 하고 그 소유전을 관에 신고하게 함과 동시에 제한액을 두어 이를 초과할 수 없게 한 규정이고, 과전법은 정(丁)을 대상으로 하여 관전을 할당하여 경작하게 한 규정인데, 현실적으로는 원래의 둔전 경작자가 새로 일반서민 호적에 편입된 것을 대상으로 한다. 다만 과전(課田)이 없는 이전의 서민을 대상으로 한 의미(義米)의 제도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과전법이 정(丁) 대상의 인신적 지배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농민들의 생활 안정과 조세의 징수를 도모하고 호족에 대해서는 더 많은 토지를 지급하여 호족들의 특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많은 모순점을 부각시켰고 애초에 약속했던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결국은 폐지되었다. 새로운 토지개혁인 균전법은 계속 보완되어 북제(北齊), 북주(北周)를 거쳐 수(隋), 당(唐)의 시대에 완성되어 안정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는 유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처음과 달리 사회적 안정과 개인적 도피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이 조금씩 쇠퇴할 수 밖에 없었고 도가를 기본으로 한 현학(賢學)과 청당(聽堂)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외래 종교인 불교까지 가세함으로 인해 오늘날의 중국 사상의 세 축인 유학, 불교, 도교가 사상적으로 정립된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점으로 하여 당나라의 도교, 송나라 유학, 남조의 불교가 자리를 잡고 각기 시대적 사상론(思想論)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여기까지 중기 선비의 문화 중에 당시의 배경이 되는 사회제도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리고 토지제도와 약간의 사상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중기 선비의 문화에서 사회제도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위진남북조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에 서술될 탁발선비, 북위의 역사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고 자세한 문화적 요소에 대한 연구는 차후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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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관리 선발제도 구품중정제의 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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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과거시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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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대동시 운강석굴의 북위 태조 도무제와 닮은 불상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17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7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02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33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313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288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8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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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58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58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36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276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31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012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492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720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70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51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4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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