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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5     조회 : 367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탁발규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굴돌이 제기한 정통성에 대한 부분은 탁발규의 아버지가 탁발십익건의 둘째 서장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탁발규의 즉위는 합법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모친인 하씨 부인의 도움으로 탁발규는 독고부 군대의 공격을 피해 백성을 데리고 하란부로 이주하고 후연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탁발규의 행위에 유현과 굴돌은 전연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인 서연(西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후연의 황제 모용수는 북방 경영에 위협이 되는 서연과 동맹한 유현과 굴돌을 응징하기 위해 탁발규를 지원했다. 탁발규와 후연의 모용수는 서연과 유현, 굴돌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유현의 세력도 약해졌고 독고부에서는 내란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타서 탁발규와 모용수는 연합해 독고부를 쳤고, 대승을 거두었다.


독고부의 위협이 없어지자 탁발규의 북위는 점점 더 강성해졌다. 북위가 성장하는 것의 배경에는 후연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점점 성장하는 북위에 두려움을 느낀 모용수는 북위를 압박하기 위하여 중산에 사신으로 온 탁발규의 동생 탁발고를 억류하고, 전쟁에 쓸 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한 모용수의 배경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 유목민족의 제도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모용수는 북위가 아직 성장 중이라서 유목민족적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서(魏書)』, 卷 二,「太祖 道武帝傳」, 第二. [본문] 登國元年正月六日,拓跋珪得到以賀蘭部為首的諸部支持在牛川大會諸部,召開部落大會,即位為代王,年號登國。拓跋珪任用賢能,勵精圖治,重興代國。即位不久,便移都代國原都盛樂,並推動農業,讓人民休養生息。同年四月,改稱魏王,稱國號為魏,史稱北魏。北魏建立時四週有強敵環伺,北有賀蘭部、南有獨孤部、東有庫莫奚部、西邊在河套一帶有匈奴鐵弗部、陰山以北為柔然部和高車部、太行山以東為慕容垂建立的後燕及以西的慕容永統治的西燕。因為叔父拓跋窟咄為了爭位與劉顯勾結,企圖取拓跋珪而代之形成內部不穩,于桓等人意圖殺害拓跋珪以響應窟咄,莫題等人亦與窟咄通訊。拓跋珪殺死于桓等五人,赦免莫題等七姓,但都因恐懼內亂而往依賀蘭部,借陰山作屏障防守,又派人向後燕求援。同年十一月,拓跋窟咄逼近,部眾惶恐不安。慕容垂之子慕容麟帶領的後燕援軍此時仍未到,於是先讓北魏使者安同先回去,讓魏人知燕軍已在附近,穩定人心。拓跋珪於是領兵會合後燕援軍,在高柳大敗拓跋窟咄。窟咄帶領殘兵敗將西逃,依附鐵弗部,被鐵弗部首領劉衞辰殺死,拓跋珪接收其部眾。十二月,後燕任命拓跋珪為西單于,封上谷王,但拓跋珪不受。


그러나 그러한 모용수의 생각과는 달리, 탁발규는 형제상속제를 폐지하고, 부자세습 제도를 도입하는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 탁발규는 이러한 협박에 모용수를 비난하면서 거절했다. 전략에 실패한 모용수는 대노하여 탁발고를 죽이고 북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구실을 찾게 되었다. 한편 탁발규는 모용수와 적대관계가 되면서 서연의 모용영(慕容永)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후 독고부의 부족들이 탁발선비에 귀속되었다. 탁발규는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를 토벌하여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고, 중원으로 진출을 개시했다. 한편 후연의 모용수는 북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가장 걸림돌인 서연을 공격하기로 결의하고 아들인 모용보를 보내 서연의 모용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모용영은 모용수의 계략에 빠져 연달아 패배해 결국 서연은 멸망하였다. 서연을 멸망시킨 후연의 모용수는 북위와 맞서기 위해 국경 지대에 각 요새들을 건설하고 곳곳에 방어진을 만들었다.


395년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모용보는 전쟁에 소질이 없는 위인이었다. 탁발규는 강변에 많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병사들에게 방비를 당부하면서, 대군을 파견해 모용보와 중산의 연락을 두절시켰다. 탁발규는 서신을 위조해 70세의 모용수가 죽었다고 보냈다. 모용보는 이를 믿었고, 황제의 지위가 넘어갈 것을 염려한 모용보는 서둘러 회군했다. 탁발규는 이를 놓치지 않고 정예군 2만을 지휘해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모용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하자, 오늘날 산서성 대동(大同)부근의 참합파(參合陂)까지 추격했다. 그리고 급한 철군으로 인해 후연의 군사가 지쳐서 쉬고 있었던 틈을 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참합피(參合陂) 전투에서 수만 명이 죽었고, 수만 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 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탁발규는 동생 탁발고의 복수를 대신으로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한 후연군들을 모두 참살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잔인성을 보여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후연군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감히 반항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의 의미로도 가지고 있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燕魏相持積旬,趙王麟將慕輿嵩等以垂為實死,謀作亂,奉麟為主;事泄,嵩等皆死,寶、麟等內自疑。冬,十月,辛未,燒船夜遁。)


모용보의 패전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396년 다시 출정하여 북위를 공격했다. 후연군들은 몰래 행군하여 순식간에 평성에 도착했다. 탁발규는 이 때 순시 중이었으므로 후연군들은 방비가 허술한 평성을 쉽게 접수했다. 이에 모용수는 평성에 입성하려고 행군하던 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다. 모용수는 참합파에서 후연군 전사자들의 참혹한 시체들을 목격하고 나서 중병에 걸렸다. 이 때 기록을 두고『위서(魏書)』에서는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순간, 병사들은 울부짖고 대성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평성에 까지 들렸으며, 연왕 모용수가 이를 두고 근심하였다.” 라고 하였다. (『위서(魏書)』, 卷二,「太祖 道武帝傳」, 第二. [본문]“兵事, 山通過殺屍體, 光景慘酷, 目擊一個時刻,兵事做的, 轟鳴聲大聲痛哭, 天地振動,聲音也沒, 有在平城,燕王慕容垂, 把它謹審“。)


모용수가 중병에 걸리자 후연군들은 본국으로 퇴각하였고 모용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40만 대군을 휘몰아 후연을 공격했다. 북위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상곡(上谷), 병주(昞州), 상산(上散)등을 함락하고, 황하 이북의 후연 영토 가운데 중산(中山), 업(鄴), 신(伸) 이 세 도성만 남겨둔 채로 모두 북위의 영토가 되었다. 탁발규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도성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북위의 군사들의 피해만 늘어났다. 그것은 탁발규가 항복한 포로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기 때문에 후연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 성을 사수했다. 이에 탁발규는 포로를 죽인 것에 대해 크게 후회했다. 탁발규는 포로를 모조리 죽이자 한 장수를 파면하고 투항한 사람들을 우대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397년 정월, 탁발규는 신성을 공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저항지 중 하나인 신성을 점령한 북위의 탁발규는 후연이 중산과 업성 밖에 없음을 알고 완전히 무력해졌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군력의 희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 탁발규는 북위로 회군하면서 군사를 주둔지에 배치해 후연을 감시하는 체계로 갔다.


『위서(魏書)』, 卷二,「太祖 道武帝傳」, 第二. [본문] 登国十年, 北魏侵逼後燕附塞諸部,慕容垂就於同年五月派其太子慕容寶伐魏。拓跋珪知大軍前來,率眾到河西避戰。燕軍於七月到五原後收降魏別部三萬多家人,又收穄田穀物及造船打算渡河進攻。拓跋珪亦進軍河邊,與燕軍對峙。北魏一方面派許謙向後秦請求援兵,一面卻派兵堵截燕軍與後燕都城中山的道路,並抓住取道去前線的燕國使者。因著慕容垂在出兵時已經患病,而堵截道路令慕容寶久久都不知道國內消息,拓跋珪於是逼令抓到的使者向燕軍謊稱慕容垂的死訊,成功動搖燕軍將士的軍心。燕魏兩軍自九月起隔河對峙至十月,燕軍終因內亂而被逼燒船撤退。其時黃河河水未結,魏軍未能及時渡河追擊。但次月大風令河面結冰後,拓跋珪即下令渡河並派二萬多精騎追擊燕軍。魏军在参合陂打败燕军,俘獲大量燕軍將士及官員,拓跋珪除了選用有才的如賈閏、賈彜等人留下外,將其他官員都送回後燕,但同時將燕兵都坑殺。史称參合陂之戰。登国十一年三月,慕容垂率軍再度伐魏,攻陷平城,留守平城的拓跋虔戰死,守城的三萬餘家部落皆被俘。接著慕容垂更派慕容寶等進逼拓跋珪。拓跋珪此時十分驚懼,打算離開盛樂避兵,而諸部因驍勇善戰的拓跋虔戰死,亦有異心,令拓跋珪不知所措。可是慕容垂因見參合陂堆積如山的燕兵屍體而發病,被逼退兵,並病逝于上谷。同年七月,拓跋珪建天子旌旗,並改元皇始,並正式圖取後燕所佔的中原土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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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대동에 있는 북위 시조 도무제 탁발규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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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도성 복원 모형 - 산서성 대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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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후허하오터 서남부에 있는 운중성 유지, 이 성은 북위 시기 하란부 도성이었다.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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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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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7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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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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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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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287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8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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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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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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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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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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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276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30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012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491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720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69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50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47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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