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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5     조회 : 357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해되고 오환이 위나라에 정복되자 탁발씨들은 오환의 남은 무리들을 흡수하고 그들과 함께 오환산(赤峰)근처에서 영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261년 탁발역휘(拓跋力徽)가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자 위나라에서 탁발선비를 선비부도독(鮮卑部都督)에 지위로 임명했다. 훗날 탁발씨 선비가 중원에 진출하여 북위를 건국할 때 위나라로 국호를 정한 이유가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것에 대한 근거는 매우 미흡하다.


그것은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는데 같은 건으로 유원해의 후한(後漢)도 이러한 의미에서 세워진 것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철저히 중화사관이 가미되어 있는『한서(漢書)』에서 호한야(呼韓邪)선우가 한나라의 은혜를 입었다는 내용 때문에 연관성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료적 근거로서 구체적인 근거와 주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부분은 앞으로 규명적인 사고에 의한 연구를 해봐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것은 북방기마유목민족의 민족 정체성 연구에 대한 또 다른 시각과 단위적인 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나라의 뒤를 이은 서진(西晋)은 탁발선비 씨족들을 이용하여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산서 북부의 땅을 주어 살게 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도가 있었다. 첫 번째로 다른 선비계통의 씨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서진에 복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선비 씨족에 대한 경계 및 분열시키는 부분도 생각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들 편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바로 두 번째의 의미가 앞서 서술하였던 8왕의 난 시기 때 용병으로 고용되어 서로의 전력을 절충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장점은 과도한 용병에 대한 의지로 인해 오히려 국가 체제가 해체되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까지 도출하게 되었다.


295년에는 탁발녹관(拓拔祿官)이 대인이 되면서, 탁발부를 3개의 부(部)로 나누었고 탁발녹관은 탁발씨의 중앙을 다스렸고 탁발중(拓拔重)은 동부를 다스렸다. 그리고 탁발녹관의 조카인 탁발의로(拓跋猗盧)는 서부 탁발부를 통치했다. 이후 탁발의로(拓跋猗盧)는 서부 탁발부의 세력을 이끌고 서역 각 지역을 공략하여 역량을 키웠고 결국 307년에 이르러 3개로 분열된 탁발부를 다시 통일했다.


시기는 서진 시대 말기로 8왕의 난에 간접적인 관여를 하였으나 기타 흉노나 단 선비 씨족보다 영향력이 적어 흉노와 선비의 기타 제 부족들 간에 세력 경쟁에서 밀리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탁발의로는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劉琨)과 형제의 인연을 맺었다. 그러는 가운데 흉노의 유연과 선비 다른 제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서진의 용병으로 뛰면 잇달아 공을 세웠다. 그러한 공적에 의해 310년 유곤의 추천을 받아 서진의 조정이 탁발의로를 대공(大空), 대선우(大單于)로 임명하고 식읍도 내려주었다.


『진서(晉書)』, 卷 五,「載記」, 第 五, <孝懷帝傳> [본문] 六年春正月,帝在平陽。劉聰寇太原。故鎮南府牙門將胡亢聚衆寇荊土,自號楚公。二月壬子,日有蝕之。癸丑,鎮東大將軍、琅邪王睿上尚書,檄四方以討石勒。大司馬王浚移檄天下,稱被中詔承制,以荀籓爲太尉。汝陽王熙爲石勒所害。夏四月丙寅,征南將軍山簡卒。秋七月,歲星、熒惑、太白聚于牛斗。石勒寇冀州。劉粲寇晉陽,平北將軍劉琨遣部將郝詵帥衆禦粲,詵敗績,死之,太原太守高喬以晉陽降粲。八月庚戌,劉琨奔于常山。辛亥,陰平都尉董沖逐太守王鑒,以郡叛降于李雄。辛亥,劉琨乞師于猗盧,表盧爲代公。九月己卯,猗盧使子利孫赴琨,不得進。辛巳,前雍州刺史賈疋討劉粲於三輔,走之,關中小定,乃與衛將軍梁芬、京兆太守梁綜共奉秦王鄴爲皇太子於長安。冬十月,猗盧自將六萬騎次于盆城。十一月甲午,劉粲遁走,劉琨收其遺衆,保于陽曲。是歲大疫。


탁발선비는 다시 남하하여 성락(盛楽)*에 안착했다. 탁발씨가 성락까지 남하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흉노가 중원으로 남하해가면서 가능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서진에 협력하고 흉노와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315년에는 수도인 성락이 대(代)의 영지로 인정되면서 대(代)나라의 왕이 되고 서진에 의해서도 대왕(代王)으로 인정되었다. 대(代)의 영지는 내몽골 초원지대이며 중국 범주의 바깥지역이었다. 이것은 대의 왕조가 시작된 부분에서 기존의 중원으로 이주된 강, 저, 흉노 5부가 건국한 국가들과는 다른 시작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요동과 요서의 선비 세력 국가들과 연계성 보다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던 기존의 선비 세력보다 더 유목적인 색채가 더욱 짙은 국가인 것으로 판단된다.


* 성락(盛楽)은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 화림격이현(和林格爾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나라는 백관을 두고, 형법을 정하는 등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돈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은 이미 탁발선비의 체제와도 전혀 맞지 않는 부분에 있어 부족민들의 강렬한 저항으로 다가왔다. 탁발의로는 아들인 탁발육수(拓跋六脩)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이러한 저항적인 부분은 대거 평정되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변화와 개혁이 유목민족적 삶에서 젖어있던 부족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되었고 이와 같은 민심 이반은 부족적 차원에서 분열로 종결될 수 있었다. 그러한 부분까지 고려하지 않는 개혁으로 대나라가 붕괴될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탁발울률(拓跋鬱律)에 의하여 전체적인 안정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탁발울률(拓跋鬱律)은 탁발선비에 속해있는 삭두부(索頭部) 족장 출신으로 탁발의로의 둘째 숙부인 탁발불(拓跋弗)이 아버지이다. 탁발불은 삭두부의 부족 시조이며 탁발역미가 죽고 나서 따로 부족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탁발중에 의해 동부 탁발부로 편입되었다가 탁발의로에 의해 재통일하여 대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310년 울률은 대왕 탁발의로(拓跋猗盧) 재위시기에 진나라 장군 유곤(劉琨)을 도와 선비백부와 흉노 철불부 유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로 탁발의로와 함께 삭두부의 왕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탁발의로가 아들인 육수에 의해 살해되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탁발보근(拓拔普根)의 아들 탁발시생(拓拔施甥)을 죽이고 316년 대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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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라의 시조 탁발의로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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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선비의 기원지 알선동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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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드라마에 나오는 탁발선비의 시조 탁발역휘

 

 

 
 
TOTAL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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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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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69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50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47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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