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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5     조회 : 406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씨족과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도무제가 황제가 된 다음부터 남북조의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 한국학계에서는 지배선과 박한제가 중국사의 시대구분을 할 때 북위의 건국을 남북조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하였으므로 본고에서는 지배선과 박한제가 구분한 시대적 구분론을 따르기로 하였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는 대나라 왕 탁발십익건의 손자이자 탁발식의 아들이다. 그는 대나라 하란부(下蘭部)에서 출생했으며 어머니 역시 하(下)씨이다. 371년 탁발규가 태어나기 몇 달 전 대나라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탁발식이 이를 토벌하러 종군하던 중 전사했다. 그러던 중 몇 달 후에 하씨 부인은 탁발규를 낳았고 탁발십익건이 전진과의 대치상태에서 부족이 분열될 것을 극히 우려했다. 특히 하란부 세력과의 관계가 약화 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임신 중인 며느리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 후 십익건과 하씨 부인은 아들 셋을 더 낳았는데, 그들이 탁발의(拓跋儀), 탁발열(拓跋烈), 탁발고(拓跋孤)이다. 탁발규는 배다른 형제들과 같이 지낼 수 밖에 없었고 형제에 대한 우애와 탁월한 리더쉽으로 하란부 전체를 탁발씨에서 가장 강력한 부로 만들었다. 376년 10월, 전진의 부대가 대나라를 공격하여 탁발십익건과 하씨부인, 탁발규 등의 왕족은 도성인 성락에서 양산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십익건의 아들 탁발식군(拓跋寔君)이 반란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였다. 그래서 하씨부인은 십익건을 사로잡고, 탁발규가 할아버지를 포박하여 항복을 한다는 조건으로 전진의 군대에 투항했다. (『위서(魏書)』, 卷 八十三,「燕鳳傳」, 第十 [본문] 鳳以太祖幼弱,固請於苻堅曰:“代主初崩,臣子亡叛,遺孫沖幼,莫相輔立。其別部大人劉庫仁勇而有智,鐵弗衞辰狡猾多變,皆不可獨任。宜分諸部為二,令此兩人統之。兩人素有深讎,其勢莫敢先發。此禦邊之良策。待其孫長,乃存而立之,是陛下施大惠於亡國也.” 堅從之。)


전진의 군대는 대나라를 평정하고, 십익건의 귀족들을 장안으로 보냈다. 당시 전진의 황제 부견(苻堅)은 도량이 크고 관대하여 적국의 귀족을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그러한 관용이 악조건으로 반전되어 부견은 후일 모용부(慕容部)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관용적 성격의 부견은 십익건의 귀족들을 장안의 태학에 보내 교육을 시키며 인재로 성장시켰고 기타 대나라에 협력했던 귀족들도 이와 같은 대우를 하였다. (『위서(魏書)』, 卷 二十八,「劉庫仁傳」, 第 十一. [본문] 建國二十九年,昭成暴崩,太祖未立,苻堅以庫仁為陵江將軍、關內侯,令與衞辰分國部眾而統之。自河以西屬衞辰,自河以東屬庫仁。於是獻明皇后攜太祖及衞秦二王自賀蘭部來居焉。庫仁盡忠奉事,不以興廢易節,撫納離散,恩信甚彰。)


그러나 탁발식군과 탁발규는 친족을 배신한 죄로 부견에 의해 처분이 내려졌는데 탁발식군은 형제를 죽이고 난을 일으킨 죄로 거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탁발규와 하씨 부인에게는 할아버지를 묶고 투항하려한 죄를 물어 촉(蜀)으로 유배를 보냈다. 탁발규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탁발선비의 씨족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으며 재기를 노렸다.


378년 4월, 부견은 부비(符丕)에게 17만을 주고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379년 2월, 양양자사 주서가 항복해왔다. 동진을 공격할 모든 조건이 갖춰진 부견은 직접적으로 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격하기 직전 선발대로 부융을 보내어 동진의 광릉을 압박했으나 패배했다. 여기에 부견은 노하여 대대적인 병력으로 동진을 치자고 했으나, 모든 관료들이 반대했고, 그가 믿는 동생 부융도 반대했으나, 모용부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만이 찬성했다. 부견은 이에 힘을 입어 그의 뜻대로 남정을 감행했다.


부견의 100만 대군은 383년 비수대전에서 사안(謝安)과 사석(謝石)이 이끄는 군대에게 대패하고 거의 전멸을 면치 못했다.하씨부인과 탁발규 모자는 이와 같은 혼란스러운 정국에 전진에 귀속하고 있는 탁발부 세력들에 전언을 넣는 한편 장안에 기거하는 전연의 귀족 모용수에게 청원하여 함께 이동할 수 있게 부탁했다. 모용수는 이러한 청을 받아들였고 하씨부인과 탁발규를 비롯한 탁발선비 세력들은 북방의 중산을 경유하여 옛 대나라 영토에 돌아가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자와 일행은 독고부(獨考部)에 도착했지만, 얼마 후 독고부에서 내란이 일어나 유현(劉鉉)이 독고부의 왕이 되었다.


유현은 독고부의 맹주가 되려 하였고 대나라의 옛 영토까지 넘보게 되자 탁발규에게는 유현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현은 탁발규와 탁발선비의 씨족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당시 탁발규의 고모는 유현의 제수였다. 탁발규의 고모는 이러한 사실을 즉각 하씨 부인에게 알렸고 하씨 부인은 탁발규와 탁발씨족들을 탈출시켜 하란부로 보냈다. 그러자 유현은 하씨 부인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현의 동생 집안 식구들이 이에 강력히 반대하자 하씨 부인을 죽이려던 생각에서 철회했다. 그리고 이후, 하씨 부인은 하란부로 도주하여 탁발선비 씨족들에 합류하게 되었다. *


*『위서(魏書)』, 卷 八十三,「鐵弗劉虎傳」, 第 三 [본문] 登國中,衞辰遣子直力鞮寇南部,其眾八九萬,太祖軍五六千人,為其所圍。太祖乃以車為方營,並戰並前,大破之於鐵岐山南,直力鞮單騎而走,獲牛羊二十餘萬。乘勝追之,自五原金津南渡,逕入其國,居民駭亂,部落奔潰,遂至衞辰所居悅跋城。衞辰父子驚遁,乃分遣諸將輕騎追之。陳留公元虔南至白鹽池,虜衞辰家屬;將軍伊謂至木根山,擒直力鞮,盡并其眾。衞辰單騎遁走,為其部下所殺,傳首行宮,獲馬牛羊四百餘萬頭。先是,河水赤如血,衞辰惡之,及衞辰之亡,誅其族類,並投之於河。然而.


*『진서(晉書)』, 卷 百三十, 「載記」, 第 三十, <赫連勃勃傳> [본문] 寫:後魏師伐之,令其子力俟提拒戰,為魏所敗。魏人乘勝濟河,克代來,執辰殺之。與魏書所載有所不同。


탁발규가 하란부에 도착하자 흩어져 있던 대나라 귀족들과 부족민들이 잇달아 귀속해오니 386년 정월에 탁발선비와 하란부를 중심으로 한 선비정권이 수립되고 탁발규는 대(代)나라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했다. 여기까지 탁발규가 대나라 왕이 되기까지 시대적 배경과 탁발규라는 인물의 일생이다.


여기에서 탁발규의 성정을 분석해보면 탁발규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묶고 전진에 투항하려 하였다. 이것은 친족을 배신하려 한 북방기마유목민족이 그간의 역사에서 증명했고 의리와 신뢰를 중시했던 행위와는 분명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탁발규는 분명 부족의 수장으로써 자격미달이었다. 그러나 5호 16국이라는 혼란기에는 수장으로써의 도덕적 자격을 판단하기 보다는 혈통적으로 가깝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것은 혼란기로부터 부족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통치자의 지도하에 안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정화에 대한 갈망은 탁발선비에도 예외 없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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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선비의 기마병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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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선비 발상지 후룬베이얼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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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십익건의 석상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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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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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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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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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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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312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287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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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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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58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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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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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276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31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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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491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720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69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50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47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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