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의는 단기4328년(서기1995년) 봄에 8주간
부산 전포동 <배달겨레학당>에서 말씀하신 것을 녹취한 것입니다.
한길 백공종사님의 천부경 강의(44)
그리고 또 하늘 자연의 수인 7(대삼합 6 + 하늘 1)을 이번에는 불교쪽에서 한번 찾아볼까요?
우리들이 이따금씩 절에 가서 보면 대웅전이나 혹은 다른 불상들이 모셔진 법당 벽을 보면 이상한 그림들이 벽화처럼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여러 장면들이 이어져 열 폭으로 나누어 그려진 그림들은 십우도(十牛圖)라고 하여 사람이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마음 작용을 열(十)단계로 구분지어진 그림으로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 게 있어요.
그리고 또 그 옆에 이상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법당 벽에 더러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절에서 만든 달력에 있기도 하고 또한 그 그림이 있을 만한 장소에 적당한 크기의 그림으로 그려진 사진들을 본 적이 있잖아요.
다름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의 벌거벗은 애기 모습으로 연꽃위에 서 있는 자세에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약간 미소짓는 듯한 그런 모습이잖아요.
불교에서는 이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걷고 난 후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며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라고 하면서 큰소리 쳤다는 거얘요.
보세요, 조금 아까 성경의 창세기 이얘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모습대로 진흙을 주물탕주물탕하여 아담과 하와(이브)를 만들고 난 다음 생기를 불어넣어 숨을 쉬게 하였다는 내용을 내가 정확하게 그 원리를 밝혀 하나하나 설명했잖아요.
지금 역시 마찬가지인 거얘요. 아니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사방 일곱 발자국 걷고 난 후 큰소리 쳤다고 하는 얘기, 이건 ‘뻥’이 심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니얘요? 유치원에 다니는 유치원생한테 물어봐도 그 답은 뻔 할 거얘요. 소위 기독교에서 하는 얘기, 동정녀 마리아(숫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뻥’이나 똑같은 거 아닙니까?
맹신자(盲信者)보다도 더 심각한 것을 광신자(狂信者)라고 하는데 이미 광신자로 헷가닥 해버렸으면 어쩔 수 없는 거얘요. 이를 두고 구제불능(救濟不能)이라 하여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을 하여 그 기쁨을 통하여 얻어낸 정자와 난자가 서로 결합하여 한 생명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그 자연의 법칙은 만고에 불변하는 하느님의 섭리일 진대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교리를 믿고 따르며 또 하느님을 찾느냐 이거얘요.
이치적으로야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게 종교적 신앙이 아니냐고 합리화 시켜 버리면 그냥 마음 편한 거얘요.
골치 아프게 뭐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거얘요 조금이라도 파고들어 신경 좀 써 보려고 하면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고 터질 것 같다는 얘기가 그냥 웃어넘겨 버리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얘기 아닙니까?
벌거벗은 애기 부처님 이얘기도 이와 똑같은 거얘요. 사람이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자 마자 모든 기능이 팍팍 잘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제 기능을 완전히 갖추기 위하여 서서히 발달해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모든 부위보다도 더욱 예민하게 차츰차츰 발달하는 게 뇌(머릿골)와 관련된 세포들 아닙니까? 세상에 어떻게 태어나자 마자 바로 설 수 있으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제법 깊이 있는 말을....
어떤 스님들은 제법 유식하게 생이지지(生而知之)란 말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려고 하지만 사실 그거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거든요.
지난번에 창세기 이얘기 하면서 근본원리를 파헤쳐 보았듯이 여기서도 한번 밝혀 보자구요.
먼저 알몸의 부처님이라는 것은 마야부인의 뱃속에서 갓 태어났을 때의 모습이 아니며, 설산(雪山)에서 6년이라는 오랜 수행 끝에 어느날 샛별을 보고 깨친 시절 인연을 통하여 그동안 입고 있었던 수백 수천가지의 관념에 찌든 총 천연색의 옷들을 그 순간 홀라당 다 벗어버린 거얘요. 아니 벗어버렸다기보다는 벗겨져 버렸다는 게 훨씬 더 어울릴 것 같네요. 다시 말해 마음의 눈을 떠 새로운 세상에 벌거벗은 알몸으로 다시 태어난 거라는 거얘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동서남북(東西南北)사방을 향해 원을 그리며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거 아니얘요. 아니 두 발자국도 있고 세 발자국, 네 발자국, 다섯, 여섯, 여덟, 아홉, 열 발자국도 있는데 왜 ? 하필이면 일곱발자국이냐 이거얘요. 바로 여기에서 이얘기하는 일곱이라는 수(數)의 의미가 천부경에서 이얘기하는 육생칠팔구(六 生七八九)의 칠(대삼합 6 + 하늘 1)로써 하늘 자연의 수 즉, 우주의 법칙이 순환하는 질서의 기본 수(數)라는 거얘요.
다시 말해 세존께서는 모든 것이 다 벗겨진 알몸 상태로써 대우주의 법칙을 들여다보니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더라는 거얘요. 그래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라고 했다지만 어디 그게 천상천하(天上天下)뿐이겠어요. 천좌천우(天左天右), 천단천예(天端天倪) 이렇게 덧붙여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하늘은 위, 아래, 좌우, 겉과 속도 없는 허허공공(虛虛空空)이랍니다.
다만, 천상천하라고 얘기 하는 것은 삼라만상 대우주를 얘기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 대우주속에는요, 절대성과 생대성이 함께 해있어요. 절대성은 영원불변하는 것이고 상대성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는 거얘요. 천부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6 이전은 절대성이고 6 이후에 드러난 삼라만상은 모두 상대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절대성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이름이 붙여져 있건 안붙여져 있건 각기 개체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할 진대 가치 없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거얘요. 그런 것들이 설령 인위적으로 사람이 만들었다해도 마찬가지고, 또한 자연발생적으로 드러난 모든 자연계 역시 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단, 어떠한 존재이던지 그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절대적 가치로써 이 우주에는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인 거얘요.
다시 말해 개미는 개미로서 이 우주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며 진달래는 진달래로서, 코스모스는 코스모스로서 ..... 하나같이 모두 똑같습니다.
결국 이 우주는 가장 완벽한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절대자끼리 어울려 있는 환상적인 세계라는 것입니다. 여기엔 높고 낮음도 없고 못나고 잘난 것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한 것도 없는 절대 평등이며 각자 돌아가는 역할밖에 없는 거얘요. 그저 그냥 자기 역할만 충실히 하면서 살면 이 우주에서 탈락하는 그런 수모는 당하지 않을 거얘요. 멍청하게도 자기 역할이 뭔지도 모르고 마냥 허둥대기만 하다가 한 세상 다보내는 그런 부류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자연의 현상들 한번 보세요.
누가 뭐라고 시키지 않아도 자기 역할들을 너무너무 잘하고 있지 않아요?
세존께서 벌거벗고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뜻은 이러한 뜻인 것이지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한 손 하늘로 치켜든거 아니얘요.
유(唯)의 뜻은 오직, 오로지, 다만 이러한 뜻으로 보면 되겠고
아(我)의 뜻은 존재(存在)가 지니고 있는 절대적 가치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독(獨)은 존재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하고 비교할 수 없는 비교가 안되는 독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尊)은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의 가치는 티끌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고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하느님의 모습이고 부처님의 모습이라는 것이얘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