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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어린 죽음 - 인신공양 / 평화의 땅에서 살육의 땅으로 / 끝없는 침탈과 수난의..
  
   작성자 : 배달문화원
작성일 : 2021-01-20     조회 : 1,636  

[존엄어린 죽음 - 인신공양]

중남미 영성문명의 화려함과 발전도가 모두 묻혀버리고 미개한 원시인 상태였다는 것으로 왜곡인식되어진 가장 큰 빌미가 이들 대부분이 행했었다고 전해지는 인신공양 의식때문이었다. 서양침략자들이 기록해 놓은 이러한 자료는 자신들의 잔인한 침탈과정을 합리화시키시 위해서도 인신공양 의식을 과대선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잔인한 침탈과 학살의 행태를 마치 악마를 소탕하는 천사로서의 소명을 펼치는듯이 떠들어댔던 것이다.

태양의 신, 비의 신 등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세계 농경민족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의식이다. 소나 양을 제물로 하지 않고 인간을 제물로 했다는 것이 특이한 형태로써 회자되는바, 그리스등 유럽의 경우에도 역병이 돌거나 가뭄 등 재앙이 닥쳐오면 속죄양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바쳐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돌로 쳐서 죽이곤 하였다.

또한 유럽인들은 5월 제사 때에도 그런 살육의식이 행해졌고 산채로 장작불 위에서 태움으로써 풍작을 바라는 의식도 있었다. 페니키아인들의 후예들이 이룩했던 북아프리카 공화국 카르타고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그대로 불 속에 던져넣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얘기이다. 

중세 유럽에서의 마녀사냥은 일찌기 그들 선조들이 행한 인신공양 풍습에 대한 기억의 부활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아즈텍, 마야등의 사회에서 행해졌다고 얘기하는 인신공양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생포한 포로가운데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1년간 정갈하게 받들고는 엄격한 절차에 따라 태양의 신에게 바쳐지는 의식이었다. 이는 태양의 신에게 지상의 생물 중에 가장 뛰어난 인간(그중에서도 용맹한)을 바침으로써 빛의 힘을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인신공양의 대상은 이미 죽여야 할 적이나 원수가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는 매우 신성한 품위로써 감싸인 성스러운 사자였다. 죽는 자와 죽이는 자 간에 서로에 대한 존엄과 함께 묘한 연대감정을 느끼는 영성적 혈족의식이었던 것이다.

이외 신(神)을 먹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어린아이의 피를 상징하는 성수로 신(神)모양의 옥수수 빵을 만들어 심령적 의식을 통해 성화시키고, 뱃속을 비운 정갈해진 몸으로 나눠먹는 의식이었다.

여기에는 어린이와 노인이 모두 참여하여 신과의 일체성을 이룸으로써 영적 공동운명체로서의 사회적 통일성을 실현하는 의식이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피와 살로 비유된 포도주와 빵(영성체)을 먹는 일로써 신과의 교섭을 꾀하는 의식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인신공양의 풍습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는 유럽인들은 한편으로는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원주인민들을 대량으로 고문, 학살을 일삼았지만 이들에 있어서는 제물이 된 사람도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차원을 달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들을 야만인, 미개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문명인임을 자처하는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오락을 위해 로마의 경기장이 흥건할 정도로 뿌린 피와, 아즈텍인이 제단에 신성히 바친 그것과는 양에 있어서도 비교조차 될 수 없음은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은 세계각국을 침략하여 원주인민들을 학살하고 수탈을 일삼았으며, 이러한 흡혈판을 세계 곳곳에 들이박고 그 피로 살찌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운운하는 야만의 극치를 보여왔지 않은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미대륙의 원주인들은 야만인도 미개인도 아니다.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만 사용하던 화약과 나침반을 지금의 중국민족인 한(漢)족 상인들이 서양에 팔아먹음으로써 이들의 침탈도구 생산에 일대 혁명을 가져다 주었고, 침탈자들은 그들의 본성인 침략과 약탈을 위해 총이나 화약, 대포를 대량 생산해냈지만, 평화가 유지되며 피의 침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원주인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살육도구가 생산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발전의 차이였을 뿐이다.

바로 이 차이가 침탈에 대한 항체를 키우지 못하게 되어 서양의 침략에 멸절당하면서까지 버티다가 무너진 유일한 이유인 것이다.

일부에서 미대륙의 원주인사회를 사적 소유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혈연적 씨족공동체사회로 정리하고 있으나 매우 편협된 서양인들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한 논리일 뿐이다. 정복 당시 스페인군의 입을 통해서 확인되듯이 이들 사회는 발달된 천문, 수학, 금속공예, 위대한 석조건축과 농경문화 속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했으며 정복 당시 아즈텍 수도의 인구가 30만에 이르렀다는 사실은(당시 런던 인구 4만, 파리 10만) 이들이 노예제에 기초해서 이룩된 서양방식과는 전혀 다른 인간을 위한 사회주의 사회였으며 강한 영적 공동체의식이 뿌리깊이 새겨진 사회였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의 땅에서 살육의 땅으로]

엄연한 주인이 영성의 위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는 평화의 땅을 짓밟고 유린하는 제국의 무리들은 서로 다투어 땅을 차지하며 노략질을 정당화시켰다. 자신들의 보잘것 없는 약탈문명을 최고의 문명인양 자랑하며 미개한 사회에 빛을 열어준 은인인양 자화자찬하는가 하면 선교를 위한 위대한 이주라고 근엄하게 선언하기도 하였다.

아즈텍 사회는 단기 3825년(서기 1492년) 유럽의 침략자들이 싣고 온 총과 대포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되었다. 잉카는 단기 3865년(서양기원 1532년) 최후의 왕이 살해되었고, 마야는 단기 3875년(서양기원 1542년) 정복당하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살육을 피한 원주인들은 총칼이 미치기 힘든 험난한 고지나 삼림 속으로 이주하여 공동체 재건을 꾀했다.

마야인 일부는 티칼 근처로 이주하여 대도시를 건설, 단기 40세기(서양기원 17세기)까지 유지하며 번영했으나 단기 4030년(서양기원 1697년) 소위 '마야 전멸 소탕전'이라고 이름붙인 스페인군의 침략으로 인해 처절하게 학살당하여 호수는 피빛으로 물들었으며 마야 최후의 도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당시 700부족에 이르던 마야는 현재 55부족만이 명맥을 잇고 있어 침탈자들에 의해 원주인들이 얼마나 참살되었는가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원주인들에 대한 무차별한 학살뿐만 아니라 그나마 살아 남은 원주인들에게 침탈의 도구 즉, 무거운 닻, 배의 로프, 화약 등을 져나르는 일을 총칼로 위협하며 혹사했다. 광산에서 금은을 채굴하는 것도 밭을 경작하는 것도 원주인이었지만 그것들로 배가 부르는 것은 제국들이었다.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경우에는 원주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부락전체를 불태워 죽이는 것이 예사였으며 훈련시킨 개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개에게 원주인의 몸이 찢겨져 죽는 것 또한 유럽 침략자들이 웃을 수 있는 소일거리일 뿐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영국, 프랑스 등도 합세하여 저마다 원주인의 머리와 다리와 심장을 잡아당기고 뺏고 빼앗기면서 피의 잔치를 벌이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미 일대, 자메이카, 아이티에서는 학살과 강제노동 끝에 아라와크족 등의 원주인이 멸절되자 고갈된 원주인 노동력을 대신하여 흑인노예를 대량 투입, 농지개척이라는 명목하에 사탕수수 재배를 하여 생산물을 착취하였다. 현재까지도 영국령인 아이티의 경우 거의 모든 인구가 흑인인 것은 식민정책의 결과이다. 흑인노예를 대량 투입한 이유는 흑인 노예가 단결의 핵이 없었던데 비해 원주인민들은 노예제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며, 곳곳에서 일어난 원주인 항쟁이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스페인은 영국, 프랑스 등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을 유혹하는 것은 농산품보다는 황금이었다. 아즈텍이든, 잉카든, 마야든 황금만 눈에 띄면 송두리째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한 두 덩어리의 황금을 손에 더 넣기 위해 한 가족을, 마을을 불사르는 일을 망설이지 않은 자신들의 소행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원주인을 사람이 아닌 개(犬)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단기 39세기(서양기원 16세기)에 제정된 스페인 법률에 '어떻한 자도 인디오를 개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함으로써 그 가증스러움의 정도를 더해주고 있다.

침탈자들의 이러한 잔인함으로 인해 노동력이 고갈되자 스페인은 식민지 하급관리나 군인들에게 원주인과의 결혼을 강행시켰다. 이런 결과로 현재 멕시코는 혼혈인(메스티조)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름답고 광활한 대지 위에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되어 꽃피우던 찬란한 영성문명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용감한 전사의 죽음과 함께 돌무덤이 되어버렸다.



[끝없는 침탈과 수난의 대륙]

총과 대포 등의 무력으로 미대륙 살육의 정복을 마친 유럽 침탈자들은 그들의 목적에 따라 지역간에 약간의 차이를 두면서 식민정책을 뿌리박아 나갔다.

멕시코에서 칠레에 이르는 스페인령 식민지는 본국에서 보낸 부왕에 의해 살아남아 있는 원주인민을 이용한 잔혹한 노예제를 강행하였고, 영국령이었던 북미 일대, 자메이카, 아이티 등에서는 원주인민의 멸절이후 흑인을 사냥해와 사탕수수 재배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방식의 식민지배는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대부분 독립하여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제국지배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사회, 경제구조는 여전히 그들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지배자의 단순 교대와 지배방식의 변화만이 이루어진 상태이며 외형상의 독립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독립의 의미와 그 파급도 제국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나타난다.

단기 42세기(서양기원 19세기)에 대부분의 나라가 독립하면서 노예제가 폐지되고 그 변종인 뻬오나헤(멕시코), 아센다(칠레) 등의 이름을 가진 대토지 소유제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노예폐지법이든 독립이든 상관없이 원주인들에게 하루 18시간의 노동을 부과하였고, 대토지소유제라는 것은 사실상 이주도 불가능한 가운데 빚이 상속되었으므로 태어난 후손은 곧 채무노예로서 부친의 노동과 빚의 굴레가 씌어졌다. 또한 탈출한 경우에는 경찰과 군대에 의해 잡아들여졌음은 물론이다. 생존조차 힘든 정도의 임금을 받았으므로 출산, 제사 등에 쓰이는 돈은 어쩔 수 없이 토지소유자에게 빌려야 했는데 이들이 받았던 임금이란 것도 영지 내에서만 통용되는 명목화폐였던 것이다.

전형적인 대토지 소유제는 멕시코 북부와 중부지방에서 발전했다. 그러나 원주인 공동체는 여기에 강제편입되는 것을 강력히 저항했고 산악지대의 중심지로 이동해서 그곳의 협소한 땅에 다시 또 끈질기게 공동체를 재건했다. 고원이 많고 삼림이 울창한 중남부에서는 대토지소유제에서 벗어난 원주인이 70~80%까지 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이들을 해체시키고 공동체토지를 빼앗기 위해 '구획회사법'(아직 이용되지 않은 국토를 조사하고 구획한다는 명목으로 회사를 건립하여 그 토지의 3분의 1을 조사를 담당한 구획회사에게 주고 나머지는 돈으로 매각하였다. 이것은 외국자본가에게도 개방하였다.) 등을 실시해 원주인의 끈질긴 공동체 재건 노력은 파괴되고 이를 이용해 미국자본은 북부멕시코에 거대한 토지를 갖게 되었으며 스페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이 다투어 진출하였다.

광산업, 철도, 건설 등의 산업에 있어서도 식민지 독립국이 자본주의 형성의 생산력을 구비하지 못한 틈을 타고 영국, 미국의 자본이 침투하여, 쿠바의 중심산업인 사탕산업은 미국이, 칠레의 중심산업인 광산 및 초석산업은 영국, 미국 등이 나누어 차지하고, 철도 광산 등의 멕시코 중심산업도 영국과 미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기서 나온 이윤을 재투자하지 않고 70~80%를 본국으로 빼돌렸다. 이러한 수탈경제 속에서 생산수단의 중심부분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하였기 때문에 자국의 경제는 점점 더 자립하기 힘들게 진행되어졌다. 이렇게 이중 삼중의 수탈에 처한 인민들의 삶은 인간 이하의 삶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외국 자본주의는 저들의 이익에 따라 끊임없이 경제수탈을 자행했고 중심부를 지배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의 축으로 되었으며 내정간섭을 그칠줄을 몰랐다. 이러한 외국자본의 침입과 수탈의 잇권다툼 속에서 노동대중들의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필연적으로 혁명화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은 오히려 혁명을 적당히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칠레에서 일어난 사상 초유의 평화적 혁명은 미국이 주도한 반혁명에 의해 좌절하였다.

중남미의 혁명은 멕시코 - 과테말라 - 볼리비아 - 쿠바 - 페루 - 칠레 - 니과라과의 순으로 일어났다. 이 중에서 특히 쿠바, 칠레, 니콰라과 등의 혁명은 베트남 혁명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자본주의 세계의 위기를 심화시켜 왔음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단기 43세기(서양기원 20세기)부터 중남미 제국은 UN창설과 더불어 국제정치적으로 각광받게 되었으며 이 지역이 갖는 경제적 잠재력의 부상에 따라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많은 이민과 자본이 유입되었다. 이곳은 경제면에서는 세계적인 자원 공급지일 뿐만아니라 경제협력과 통상의 주요대상이 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제3세계외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미대륙의 슬픈 역사 속에서 침략자들의 집요한 원주인 말살 정책을 거부한 채 선조들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들이 조상들의 명예와 문화를 되살리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사례들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캐나다에서는 토착 전통예술로서 원주인들의 예술을 재정립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으며 원주인 출신의 예술가 빌 리드와 로버트 데이비슨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의 원주인들이 자신들의 무기력화를 시도하는 백인미국의 지원정책을 거부하고 독립된 사회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여권으로 외국여행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군축을 위한 미소정상회담이 벌어진 모스크바까지 ?아가 살인침략자 백인미국을 규탄한 원주인들도 있었다. 이들의 광복을 위한 끈질긴 저항의 노력에 감탄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 장엄하고 화려했던 인간을 위한 영성 문화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서양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비틀어지고 천시되었던 사회부분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조명될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수많은 선조들의 얼이 서린 유적이 더렵혀지고, 불에 태워지고, 총칼에 깨어지고, 개에게 찢겨져 멸절될 정도에 이르도록 비명에 쓰러져간 선조들의 원한이 뒤덮고 있는 하늘과 땅에서, 다시 당면한 세계자본주의의 첨단화된 폭력 앞에 원주인의 공동체는 서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원주인의 끈질긴 항쟁을 그 어떠한 핵무기로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 속에 단군의 땅이 영원히 살아 있듯 미대륙은 한치도 내어줄 수 없는 원주인의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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