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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국의 유래와 춘천(1) [박성수]
  
   작성자 : 배달문화원
작성일 : 2020-02-09     조회 : 431  

2012년 춘천문화원 창립 60주년 학술회의 발표 내용으로 완벽하지는 않으나 참고가 될 것 같아 올립니다.
  
맥국의 유래와 춘천
- 우두대촌과 청평사 -
[박성수 /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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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 리 말
2. 춘천은 맥국의 도읍지
1) 춘천 맥국과 太素庵
2) 조선유민의 나라. 맥국
3) 맥국의 사회와 문화
4) 일본과 중국을 정복한 맥국인
3. 소전은 민족고유문화의 전수자
1) 진역유기와 규원사화
2) 삼신교의 교지와 소전
3) 수미균평위와 화백
4) 치우환웅의 수련법
4. 요약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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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 리 말
우리나라 역사가 2천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많았으나 1970년대에 계연수의 『환단고기』가 공개된 뒤로는 상황이 달라져서 반만년 역사란 재래의 학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아래 도표는 『환단고기』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6천년 역사의 계보이다. 이 계보를 보면 우리 역사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환인의 환국에서 환웅의 배달국을 거쳐 단군조선에 이르는 상고사를 전반기로 하고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 4국사와 후기 신라와 대진(발해) 그리고 그 이후의 고려, 조선 대한민국이 후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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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
-고구려- 대진(발해)
환국桓國-배달국-고조선-부여(예맥) - 백제
- 신라- 후기 신라 - 고려 - 조선-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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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후반기에 많은 관심을 쏟았으나 전반기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이란 이유로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 그 결과 우리 역사의 머리 부분이 몸체에서 떨어져 나아가 도깨비와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우리역사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이어주어야 제 모습이 복원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와 몸을 이어주고 있던 부여와 예맥의 역사가 밝혀져야 한다. 춘천의 우두촌과 청평사는 이 우리나라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는 열쇠가 되고 있다.
다시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우리 역사의 목숨은 부여(예맥)가 살고 죽는데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된다. 삼국사기는 부여의 역사를 무시하였으나 맥국의 역사가 살아있다. 예맥은 고조선의 핵심민족이었고 조선이 망하자 그 유민이 되어 대거 한반도로 남하여 춘천 땅에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곳이 춘천의 우두촌이다. 춘천의 우두촌은 이름 그대로 우두 벌에 정착하여 고조선을 재건한 성지인 것이다. 맥국은 단군조선과 삼국의 맥을 이어준 고리였던 것이다. 우두대촌은 단군조선과 삼국 사이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주었고 또 하나 청평사는 단군조선의 정신문화를 이어준 혈맥이었다.
 
2. 춘천은 맥국의 도읍지
1) 맥국과 태소암
 
예맥은 단군조선의 핵심 주족主族이었고 단군 조선이 망하자 나라를 잃은 예맥족은 남으로 이동하여 춘천 우두촌에 정착하였다. 춘천에 맥국이 있었고 맥국이 고조선 유민이 세운 나라였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확인되어 왔으니 실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그의『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춘천에 맥국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맥국의 도읍지는 지금의 춘주春州 복방 13리 소양강 서쪽에 있었다. 춘주는 지금의 춘천春川이며 이전에 맥국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그는 맹자를 인용하여 예맥에는 "대맥大貊과 소맥小貊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는 모두 북방의 이적의 나라이다“고 하였다. 이 말은 맥국 사람들이 북쪽의 만주 땅에 부여란 나라를 두고 남하하여 부여가 대맥이요 춘천의 매국이 소맥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이다. 왜나 하면 북쪽의 대맥에는 오곡五穀이 나는데 오과五果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맥국의 정확한 위치는 춘천의 어디인가. 춘천에는 삼국시대 이전의 맥국 유적지가 두 군데 있었다. 현재의 춘성군春城郡 신북면新北面 발산리鉢山里인 우두대촌이다. 이 마을에 왕대산王臺山이 있고 주천지朝天池가 있고 또 마을 한복판에 맥둑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맥둑>이었는데 역사를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최근 귀중한 맥국 유적을 파서 없애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찍이 고려시대의 선비 이승휴李承休는 그의『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요동에 별천지別天地가 있으니 중국과는 판연히 다른 곳”이라 하였다. 그 중에 맥국이 들어있었다. 또한 조선 초의 선비 이맥李陌은 그의『태백일사太白逸史』에서 맥국을 단군조선의 일부라고 했다. 물론 이 맥국도 북쪽에 두고 온 부여와 남으로 내려온 매국을 가리킨 말이다.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는데 그 뒤의 삼한, 고이, 시라, 고례, 옥저, 부여 그리고 예맥濊貊이 모두 조선의 후신(壽)이었다.
 
또 다른 맥국의 유적지는 청평사淸平寺이다. 청평사는 고려 말에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진역유기震域遺記』란 귀한 책을 썼다. 이명의 『진역유기』는 조선왕조 숙종 때의 선비 북애노인이 이 책을 근거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써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청평사는 본시 태소암太素庵이 있었던 곳인데 후술하는 바와같이 태소암에는 소전素佺이란 거사居士가 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암자에 많은 환단진서桓檀珍書를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찾아간 사람이 고려 말의 행촌 이암杏村 李巖과 앞에서 말한 이맥 그리고 휴애 범장休崖 范樟 등 3인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도 이 책들을 읽어 고기에 언급했는데 태소암에 가서 발견한 『고기』가 바로 일연이 말한 고기였던 것이다. 필자는 소전이 태소암에 소장하고 있던 『고기』가 고조선과 삼국을 이어주는 고리라고 생각하며 그 동안 이 『고기』가 끊기어 우리 고유의 민족문화가 사라졌던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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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촌 이암 단군세기
소전의 태소암 청평 이맥 진역유기
휴애 범장 북부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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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유민의 나라, 맥국
 
이암 이맥 범장 세 사람이 춘천의 태소암에 가서 환단고기를 발견한 바로 그 때 김부식이『삼국사기』를 쓰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썼는데 두 사서는 과연 맥국에 대해 어떤 기록을 남기고 있는가. 먼저 『삼국사기』를 보면 맥국은 신라와 백제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 자주 공격을 받았다.
 
·유리이사금 17년(서기 40) 가을 9월에 화려 불내華麗 不耐의 두 현縣 사람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의 우두머리(巨帥)가 군사로써 곡하曲下 서쪽에서 요격하여 이를 이겼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유리 이사금 19년(서기 42) 가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貊帥)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기림이사금 3년(서기 301) 정월에 왜국과 교빙하고 2월에 왕이 비열혼比列忽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먹은 자와 가난한 자를 친히 존문하고 곡식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을 향해 망제를 지냈다.(至牛頭州 望祭太白山)
 
눌지마립간 22년(서기 439) 여름 4월에 우두군에서 갑자기 산골 물이 덮쳐 50여 호가 표류하였다. 백성들에게 우차牛車 쓰는 법을 가르쳤다.
 
이상과 같은 『삼국사기』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맥국에 임금(巨帥)이 있고 또 스승貊帥이 있고 수례를 사용하였고 막강한 군대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백두산을 향해 천제天祭를 지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한편 맥국과 백제와의 관계도 활발하였다.
 
백제 온조 18년(서기 1) 10월 말갈이 엄습하여 오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서 그 우두머리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전부 산 채로 묻어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까지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돌아왔다.
백제 구수왕 19년(423) 신라의 우두진牛頭鎭으로 군사를 보내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忠萱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곡熊谷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단기로 돌아갔다.
백제 동성왕 8년(467) 7월에 궁성을 중수하고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
동 22년(500) 4월 우두성에서 사냥하였는데 비와 우박을 만나 중단 했다.
백제와 맥국에 관한 위의 기록에서는 우두산성, 우두 우두성이란 나오며 왜적이 침략해 온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춘주 즉 춘천은 옛날에 맥국이었다고 명기하였고 신라의 유명한 황룡사 9층탑은 아홉 나라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한 탑이었다고 하면서 맨 꼭대기의 9층이 예맥으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한 층이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또 단군조선으로부터 망명한 유민이 한반도에다 무려 78개국이나 되는 나라를 세워 살았다고 하면서 그중 서쪽의 마한에 54개 국. 동쪽의 진한에 12개국, 남쪽의 변한에 12개국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라 인구가 각각 1만호요 그 강역이 100리라 하였으니 춘천의 우두촌은 그 중의 하나였다. 즉 맥국의 인구는 5만 명에 그 강역이 사방 100 리였던 것이다. 춘천에 가보면 우두 벌의 넓이가 100리가 넘는다.
이와 같이 맥족은 본시 단군조선의 백성이었다가 조선이 망하자 만주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이주하였으니 이들이 춘주에 맥국, 강능에 예국을 세워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고 온 만주 땅에서는 해모수가 부여라는 나라를 세워 현지에서 고조선의 명맥을 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한반도로 내려온 맥족은 몸집이 크고 성격이 강하고 용맹스러윘으나 신중하고 중후하며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중하고 중후하며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야만인이 아니라 문명인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는 것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단군조선의 삼신문화三神文化를 잉어 받아 춘천 땅에다 심어 준 것이다.
홍만종洪萬宗에 의하면 우리나라를 조선이라 한 것은 선인仙人이 많이 살고 있는 나라란 뜻이라 하였다. 선인이란 흔히 말하는 도사 또는 거사였는데 단군조선에서는 그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하였다. 조선의 국자랑은 신라의 화랑花郞이 되고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仙人이 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수사修士가 되었으니 맥국에도 고조선의 국자랑이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왜냐 하면 신라인과 고구려 백제 그리고 예맥인은 모두 단군조선의 유민이었기 때문에 단군의 가르침 즉 풍류도風流道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의 풍류도를 믿는 국자랑은 중국의 선인과 달랐다. 중국의 선인은 나라를 위해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오래 살려고 자기 몸을 위해 도를 닦는 수도사들이었다. 이것이 후일 중국인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되고 민족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국자랑은 단군의 아들인 부루 부소 부여 삼랑三郞에서 보듯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는 호국선인護國仙人들이었다. 고구려의 선인 역시 호국선인이었다. 심지어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까지도 토착화하여 호국불교로 만드는 그런 세계종교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불교가 삼국에 자리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보면 단군조선에 일명 천지화랑天指花郞이 있었다고 하였다. 천지화랑은 소도蘇塗라는 천지제단을 마련하고 제단에 천지화(일명 환화桓花 즉 無窮花)를 심고 미혼자제들을 가르쳤는데 그들이 배운 과목은 독서와 궁술.(讀書習射)이었다. 그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는 필수과목이었다. 독서습사하기 위해서는 책이 있어야 하고 활이 있어야 했다. 그들이 글을 읽고 활을 쏜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나라의 아들 즉 국자랑國子郞이라 하였던 것다. 그들의 활은 조선에서 가져온 단궁檀弓이 었다는데 맥국에서는 이를 개조하여 훨씬 강한 맥궁貊弓을 제작하여 사정거리 1000보라 하였다.
동명왕의 이름을 주몽이라 한 것은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가리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여의 맥국이 신라로 전수되어 궁사弓師 구진천仇珍川의 애국담이 『삼국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맥궁의 제작 술과 사격술은 신라 고구려 백제로 이어져 오늘의 국궁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국맥은 국자랑 화랑 조의선인으로 이어졌는데 그 인맥은 환인 환웅 단군을 거쳐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백제의 계백장군階伯將軍으로 이어졌다. 맥국에도 그런 장군이 있었는데 위의 예문에 나오는 거사(巨帥) 또는 맥사貊帥가 그들이었다. 삼국사기에 보듯이 북쪽 국경을 침범한 적을 막는데 맥국의 거사巨帥가 출동하여 적을 막았다. 신라의 김유신은 화랑이었는데 나이 18세에 검술劍術을 익혀 중악中嶽에서 도통하여 국선國仙이 되었다. 그의 검술은 장검으로 검술을 닦는 수협득술修鋏得術이었다.
김유신이 혼자 산중의 석굴에 들어가 제계齋戒하고 하늘에 맹세하면서 고행하던 중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비법을 전수하여 주었다는 것인데 그런 노인이 바로 호국선이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 조를 읽어 보면 신라라는 나라를 일으킨 사람들은 맥국 사람들과 같이 고조선의 유민이었다. 고조선이 망하자 고향을 버리고 남하하여 흩어져 살다가 차츰 인구가 늘어나자 여섯 마을을 이루고 서로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열어 나라 일을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뽑은 임금은 단군의 후손 박혁거세였다. 혁거세는 신덕神德이 있어 부정이 없는 밝은 정치를 해서 모두가 우러러 보았다. 박혁거세의 정치는 광명이세光明理世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광명이세란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이념을 말하는 것이었다.
 
3) 맥국의 사회와 문화
 
홍만종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우리 고유의 문화가 있었으니 선도문화이다. 우리나라의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는데 조선의 어원은 본시 조선潮仙 즉 선인仙人이 조수와 같이 밀려드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민세 안재홍(1892-1965)도 삼한과 예맥 등 여러 나라의 일상생활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다. “삼한의 영역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서남부가 포함된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고 중국의 사서를 종합해 보면 예맥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농업은 물론 잠상蠶桑과 직작織作이 발달하여 직포와 세포를 산출하여 인민은성곽과 성책 안에 집을 짓고 살았다. 또한 철을 산출하고 밖으로 왜倭와 무역하고 직포織布(옷감)가 화폐처럼 쓰였다. 우마로 가마를 이끌었고 금은금수金銀錦繡를 보배로 알지 않고 그 대신 진주와 구술(瓔珠)을 보배로 삼아 의복에 구술을 장식으로 삼았다. 신발도 가죽으로 만들어 신었다. 비단 같이 아름다운 옷감을 맥포貊布라 하였고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 맥궁은 8척이나 되는 석노石弩와 강력한 가시나무 화살(楛矢)이 유명하였다.
 
예맥의 종교로서 소를 잡아 천신제天神祭를 지냈다는 사실을 빼어 놓을 수 없다.
 
나라마다 한 사람을 뽑아 천신제(祭天)를 주관하였는데 그 천신을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천신제를 위한 소도蘇塗는 춘천뿐만 아니라 강원도 어느 마을에서나 그 유적 유속이 남아 있다. 매우 귀한 고조선 문화의 유산이다. 소도제천은 단군조선의 핵심을 이룬다.
 
마한에서는 마을마다 별읍別邑을 설치하여 이름 하기를 소도蘇塗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워 쇠 방울과 북을 달아맨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여인은 예맥인의 후예였다. 예맥인은 비단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주와 중원에도 널리 퍼져서 살고 있었다. 북으로 넓고 넓은 만주 땅을 차지하였으며 남으로는 넓은 회대지역을 차지하였다. 또 사람들은 강하고 용맹스러웠고 중후하여 노략질을 할 줄 몰랐다.
 
부여인은 활과 칼을 무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였다. 나라에 군왕이 있고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등 관직이 있었다.
 
이 같은 부여인의 기질은 모두 예맥인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옥조와 예맥인들은 매우 씩씩하고 보전步戰에 능하였다.
 
삼한인三韓人들도 성질이 몹시 강인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성곽을 쌓아 놓았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운 청년들을 뽑아 항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질이 고구려에 이어져서 고구려가 수당의 백만 대군을 물리칠 정도로 강인하고 전투에 능했던 것이다
고구려인은 기력을 중시하여 화살, 칼과 창을 잘 쓰고 갑옷을 입고 투구를 날리며 전투를 익혔다.
 
사람들은 글 배우기를 좋아하고 상민 집에서도 서로 글 배우기를 힘쓰고 자랑하며 길거리에 모두 서당을 지어놓고 미혼 자제들을 한데 모아 경서를 외우고 활쏘기를 연습(讀經習射)하였다.
 
조선 초의 유학자 권근은 고구려인에 대해 본시 무강하였다고 격찬하였다.
 
고구려는 처음부터 무강하였다. 고구려는 요遼 금金과 국경을 접했기 때문에 그 풍속이 굳세었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 이래로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그 풍속이 굳세더니 드디어 중국의 대병력으로도 승복시킬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강웜도 홍천과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근접한 인제에는 다물多勿이란 지명이 남아있어 고구려의 유풍을 볼 수 있다. 다물은 광복이란 말의 고구려 토착어이다. 고구려인의 기상은 모두 배달국 신시 시대의 치우 환웅의 성품을 이어 받아 용맹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활은 천하의 명품으로서 본시 단궁檀弓이라 하던 것이 맥궁貊弓이 되어 그 성능이 한 층 강화되었다. 맥궁의 제조법은 극비에 붙여져 오늘에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맥포貊布란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맥국의 직조술織造術이 유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남녀 모두 흰 옷을 숭상하여 부인은 얼굴가리개 옷을 입었고 패물은 일체 몸에 달지 않았다고 한다.
 
4) 일본과 중국을 개척한 맥국인
 
어떤 학자는 예맥족이 남하할 때 동해안과 서해안 양쪽으로 갈라졌는데 동해안 쪽으로는 박씨가, 서해안 쪽으로는 김씨가 남하하였다고 한다. 그럼으로 강릉에 정착한 예족은 강릉에 자리를 잡아 나라를 세웠고 맥족은 춘천에 자리를 잡아 우두촌에 자리를 잡아 맥국을 세우게 된 것이다. 다른 일부는 남해안의 김해로 내려가 가락국을 세웠다. 그리고 그 일부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를 세워 일본민족의 시조가 되었다. 일본 북구주北九州에 가면 여러 곳에 그 유적이 하나 둘이 아니라 너무 많아 따로 단행본을 만들어야 할 정도이다. 지금 일본의 온천지로 유명한 벳부(別府)가 있는 오이따(大分)에 가보면 그 시절 일본으로 이주한 예맥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 성명을 가라시마(辛嶋)라고 하면서 스스로 한국(가라)에서 섬(시마)으로 건너 온 사람임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선조가 판 우물에 신사(井神社)를 세워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고 마을 산을 구지산(龜旨山 수로왕이 내려 왔다는 가야사)이라 부르면서 천제를 지내고 있다. 거기 가면 박물관도 있어서 참고가 된다. 그밖에도 유적지가 많다.
일본의 전설에 따르면 예맥족이 일본으로 건너 갈 때 지도자가 아마테라스 여신(天照大神)과 소시머리(素尸毛利) 내외였다고 하며 자기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 나니면 경상도 김해라고 믿고 있었다. 우두산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관광객들이 「욘 사마」를 찾아 춘천에 왔는데 그들은 일본인의 조상이 소시모리요 우두산이란 사실을 모르고 온 것이다.
한국인이 삼한시대에 일본열도로 건너 간 사실은 이미 널리 아려져 있다. 한국에서 대마도가 육안으로 보이며 대마도에 가면 일본 섬이 마치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듯이 잘 보인다. 그래서 한국인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미지의 섬 일본으로 이주했던 것이며 그곳에다 삼신신앙과 삼신문화를 심은 것이다. 그 증거의 하나가 바로 영언산(英彦山 일명 히꼬산日子山)의 환웅신앙이다. 영언산은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구주 북단에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지금도 영언산을 천신이 내려오신 영산靈山으로 알고 있고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영산에 오를 때 일본인들은 반드시 입을 다물어야 하며 조용히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가 하느님이 주신 약초를 따다가 달여 먹는다. 약초는 환웅과 단군이 몸에 걸친 풀잎 옷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에서 한 부러 떠들고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조용히 산행하여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다고 하였다. 산에는 우리 조상의 산소가 있고 호랑이가 있어 악인의 입산을 막았다. 영산은 보통 야산과 달라 우리들 조상의 「얼」이 살아있는 성역이다.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도 그런 영산의 하나이며 강화도 마리산(일명 마니산)에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참성단이 있고 삼랑성이 있다. 삼랑三郞이란 단군의 아들인 부루 부소 부여 세 분을 말하며 화랑의 원조이다. 단군에게 배운 최초의 화랑이 삼랑이었던 것이며 신라에 가서는 사선四仙이 되었다.
그런데 신라의 화랑도가 고조선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문화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화랑도를 신라의 <도>로만 알고 있으나 멀리 단군시대부터 전해내려 온 우리 민족고유의 문화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불도 외래 3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 중엽이었고 그 이전의 시대에는 우리 고유의 신앙 우리 고유의 문화가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 민족문화의 처녀시대였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삼신신앙만 있었다. 불교도 유교도 없었다. 그런데 공자보다 400년이나 앞에 지자가 와서 유교를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라의 화랑도는 단군시대의 삼신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신앙은 신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발해와 고려 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져 오늘의 한류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 뿌리를 이어준 곳이 춘천의 맥국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에도 화랑도가 건너가서 일본문화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화랑도는 일본에서 더 오래 계승되어 일본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화랑도를 수헙도修驗道라 하는데 그 내용은 화랑도와 흠사하다. 화랑도의 세속오계가 일본 수험도의 수험오계였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수련에 있다. 육체와 정신을 닦는 것을 수련이라 한다. 수련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육체를 닦는 수신 이외에도 중요한 것은 정신을 닦는 일이다. 산행도 정신수련의 하나이다. 요즘의 등산과 다른 것이다.
한편 중국사서의 기록을 보면 예맥족의 대 활약 상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의 요순시대는 조선의 단군시대에 해당하는데 동이는 해가 돋는 땅에서 종종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하거나 서로 교류하여 평화적으로 교류하기도 하였으니 그 때 맥족은 아름다운 비단옷과 구술 그리고 음악과 춤을 선보여 우리 동이의 문화를 전파하였다고 한다.
둘째로는 중국의 은殷 나라가 쇠퇴하면서 동이족이 중국의 회수와 대산 사이의 넓은 땅을 점령하고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지하에서 쇠와 구리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맞서 중국도 맥국을 침략하였다. 이들이 바로 치우환웅의 후손들이었다. 그 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자 중국의 곡창지대인 회대淮岱의 동이족들이 일부 진나라의 민호民戶(백성)가 되었고 1백년 후에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을 침략하여 맥인貊人들이 이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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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정의화 국회의장 당시 '춘천 하중도 고조선시대 유적지 보전'에 관하여  국회의장실에 제출된 자료입니다. <자료출처>춘천 고조선 유적지 보존협의회 다음카페 -> http://cafe.daum.net/2014.12.12./cJCd/65
Name: 배달문화원  |  Date: 2020-02-09  |  Hit: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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