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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위, 백제와의 전쟁과 효문제, 문소황후의 죽음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7     조회 : 361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대대적인 한족문화를 받아들이는 작업 시행했다. 이것은 풍태후도 하지 않았던 일로도 일찍이 풍태후의 섭정시기에도 이러한 제안이 들어온 적 있었으나 풍태후는 선비족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우려하여 실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효문제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위험한 일을 자행했다. 효문제는 선비족의 복장과 언어를 금지하고, 황실의 성씨을 원씨(元氏)로 고치고,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를 만들었다. 이것은 선비계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사게 되었다.


494년 12월 북위는 다시 대군을 발하여 정남장군 설진도, 대장군 유창, 서주자사 원연, 평남장군 유조의 부대를 4방면으로 나누어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으로 공격하여 백제와 남제를 공격한다.*(『남제서(南齊書)』, 卷 五十八, 「百濟傳」,第 十七 [본문]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 때 백제와 남제는 다시 연합하여 북위군과 맞서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북위는 두 번 다시 백제와 남제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위서(魏書)』, 卷 七,「帝紀」上, 第 七 <高祖孝文帝> [본문] 十有二月辛丑朔,遣行征南將軍薛眞度督四將出襄陽 大將軍劉昶出義陽,徐州刺史元衍出鐘離,平南將軍劉藻出南鄭.)


선비족과 한족명족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한족 문화와 동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선비 고유의 소박한 상무정신은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었다. 그리고 효문제의 이러한 정책에 고구려계 고조의 일가들은 이에 찬성하여 선비계 귀족들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


492년 고구려의 장수태왕이 죽고 문자명왕(文咨明王)이 즉위하자 효문제는 문자명왕에게 사절을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고 여러 공물을 선물로 보내자 양국의 사신 왕래가 빈번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4분기 계절마다 한 번씩 사자가 왕래하였는데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서 북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인 부분이 대부분으로 보면 된다.9『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九,「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七, <文咨明王> [본문] 元年, 春三月, 魏孝文帝遣使拜王, 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王遣世子入朝, 王辭以疾, 遣從叔升千, 隨使者詣闕, 夏六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한편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문소황후는 둘째가 광평왕(廣平王),딸이 장락공주(長樂公主)을 출산하였고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장락공주를 고조의 조카인 고맹(高猛)에게 출가시켜 북위와 고구려계 고조 일가는 더욱 단단한 혈맹으로 뭉쳐지게 되었다. 그리고 496년 북행궁(北行宮)에서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는 도중 돌연사하고 말았다. 이것은 선비계 귀족들이 고구려계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는 점에서 의문사로 볼 수 있다. 마장수(馬長壽)는 이러한 문소황후의 죽음이 선비계 귀족들의 견제로 인한 독살로 추정하고 있으나*( 馬長壽, 『北狄與匈奴』, 北京 : 三聯書店, 1969, 78p. ) 아직까지는 정확한 사인(死認)은 밝혀진 것이 없다. 문소황후의 재궁(梓宮)*은 낙양 서쪽에 마련되었으나 효문제는 문소황후를 안장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말년에 선비계 귀족들에게 한족화에 대한 심한 반발과 견제로 인해 매장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문소황후의 시신은 아들인 선무제(宣武帝) 세종(世宗)에 의해 매장되었는데 선무제 즉위 후 모친을 문소황태후로 추존하고 손자 효명제(孝明帝)는 효문제의 장릉(長陵)과 가까운 곳으로 천장(遷葬)했다.*


* 재궁(梓宮)은 임금 · 황후의 시신을 모신 관을 말한다.


 * 영릉(寧陵)은 능 높이 23m, 둘레 170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1946년 도굴범이 능을 파헤치다가 묘지(墓誌)가 나와 황후릉이란 사실이 최초로 밝혀졌다. (羅賢佑 主編, "歷史與民族 : 中國邊疆的政治, 社會和文化",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5, 78p~80p.)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문소황후의 아들인 태자 원각(元恪)이 즉위하였다. 본 단락에서는 선무제(宣武帝)라 서술하기로 한다. 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가 폐위되어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원각이 대신 태자가 되었고 이러한 부분에 있어 고조 일가의 정치적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17세에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고조와 종실인 숙부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


500년에는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하였으며 같은 해, 북방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유연(柔然族)을 연달아 전쟁하여 승리를 거두어 북방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실제로 유연의 경우, 효문제 말기 때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 날의 내몽골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북위의 변경지역은 자연히 유연의 약탈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무제가 군을 파견하여 유연을 격파함으로써 유연은 내몽골 북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북위가 세력이 약해질 때까지 내몽골 북쪽 지역인 막북(莫北)에서 영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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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에 그려진 효문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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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와 백제의 전쟁과 백제의 대륙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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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효문제는 대동(평성)에서 오늘날 낙양으로 천도했다.

 

 

 
 
TOTAL 170
86. 당나라 고조 이연, 태종 이세민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근거
이연 집안이 한족 조상을 가졌다 해도, 탁발선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 이후부터 선비어를 말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연이 당 나라를 세운 618년에는 이미 179년 가까이 선비어를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북주는 고사하고 한족 국가로 간주해도 된다고 흔히 말하는 북제 조정의 언어 역시 선비어였다. 그리고 북주가 한화정책을 거부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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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당나라 고조 이연은 서량 황실 후손이자 선비족의 후예이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당국공(唐國公) 이병(李昞)의 자식으로 먼저 이연의 가계와 당나라를 건국한 과정, 그리고 이연의 선조들이 어떠한 인물들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나라가 선비족 계통의 국가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연의 7대조는 이고(李暠)*로 흉노 부족이 오늘날 감숙성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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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수 문제의 탄생설화와 문제의 가계에 대하여
개국 황제의 출생에는 대부분 설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수나라 문제 양견 역시 탄생설화가 존재했고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갑자기 반야사의 정원이 양견이 출생할 무렵 보랏빛으로 밝게 빛났다. 비구니가 이르기를 "보통 아들이 아니니 소중하게 키워야 한다." 라고 말했다. 양견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양견의 이마에 용의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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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수나라 양견은 선비족 출신이고 수나라는 선비족 국가이다.
흔히 수, 당을 한족 국가라 하여 한족 국가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수, 당은 본연의 문화와 한족 문화를 입혀서 혼합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수, 당이 선비 본연의 색체를 점점 잃어가던 시기에 혈통적으로 선비의 혈통인 것은 수, 당의 시조들에만 해당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나라는 문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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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북주 무제의 북제 정복과 수국공 양견의 등장
북주를 멸망시킨 이후 무제는 북제와 동맹국인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념했다.* 온달 장군이 등장하여 북주를 격퇴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고 577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평원태왕을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임명했다.*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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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북주와 고구려의 외교관계
북주와 고구려간의 외교적 부분의 대외관계에서는 고구려가 먼저 서위 시절인 546년에 외교 및 교역사절을 보냈다. 그리고는 서로간의 큰 교류가 없었다. 그것은 고구려는 원래 북제와 영토와 국경을 마주했기 때문이고, 동위와 북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고환이 고구려계이기 때문이다.* 북주가 세워진 이후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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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우문각의 북주와 우문호의 세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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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북제 북주의 돌궐과의 관계를 표현한 왜곡된 서술
북주, 북제는 돌궐이 두려워 해마다 막대한 물자를 바치고 돌궐은 그들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막대한 물자를 받아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돌궐과 북주, 북제는 지배와 피지배자 관계인데 돌궐이 북주에 조공하였다고 『주서(周書)』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명제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명제 2년(558년) 사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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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강력한 돌궐에 북주와 북제가 무릎을 꿇다
유연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창 전성기를 누릴 무렵, 서쪽에는 유연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간 유연의 관심이 북위 시기 까지는 중원에 쏠려 있었고 중원에 있는 세력들은 유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과 중원 세력들 간의 알력다툼은 매번 유연의 패배로 끝이 났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34
77. 초기 거란과 고구려와의 관계
거란은 소수림왕 제위 시기인 378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8개 부락을 탈취했다.*이것 역시 거란이 생기고 나서 단독으로 이웃을 공격하여 거둔 거란사에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거란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종속국이 되고 말았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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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우문선비의 요동, 요서 지역 정착과 모용선비와의 관계
우문선비는 강력한 세력을 일으키던 부족은 아니었으나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에는 주로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영위하였으며 주로 목축업을 하였다. 주로 목축업을 하던 지역은 오환의 옛 영토인 적봉과 서랍목륜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지역은 고구려, 부여와 주로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고 때로는 고구려의 보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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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탁발선비 연구에 대한 마무리와 탁발씨의 한족과 동화에 관하여
서위에 소속되어 있던 탁발선비의 일족은 북주가 건국된 이후 그대로 중원에 남았다. 우문선비가 건국한 북주는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오히려 전 왕조의 황족들인 탁발선비도 관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우문선비는 탁발선비의 과거 용맹성을 매우 높이 샀기 때문에 주로 무관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탁발선비의 황족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281
73. 탁발선비의 투르크계 변환과 중원 정착, 중앙아시아의 선비계 민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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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북제와 북주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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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382
71. 북위,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북제의 고씨 집안은 고구려의 후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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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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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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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북위 효문제, 백제와 전쟁에서 패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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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70
66. 북위 황실과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인
476년 고구려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북위와 통교(通交)하면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 중 고조(高肇)가 이와 같은 인물이었다. 고조(高肇)일가는 발해 고씨(撥海高氏)로 대대로 중원에 정착하여 살았던 완벽한 한족일가였다. 고조의 5세조인 고고(高苦)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 고고의 가문은 고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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