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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주와 고구려의 외교관계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31     조회 : 388  

북주와 고구려간의 외교적 부분의 대외관계에서는 고구려가 먼저 서위 시절인 546년에 외교 및 교역사절을 보냈다. 그리고는 서로간의 큰 교류가 없었다. 그것은 고구려는 원래 북제와 영토와 국경을 마주했기 때문이고, 동위와 북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고환이 고구려계이기 때문이다.* 북주가 세워진 이후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기록은 『주서(周書)』,「이역열전(異域列傳)」에 있는 <고려전>에서의 기록 세 줄이 전부일 정도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인 북제와 관계를 돈독히 하였기 때문에 북제와 적국인 북주와는 교류를 끊었기 때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친 것이 아닌 교역과 교류의 의미로써 해석해야 한다. 한족의 위한휘치로 인하여 고구려가 북주의 종속국으로 오해 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高麗傳> [본문] 연(璉)의 5세손 성(成: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이 대통(大統) 12년(546년)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 璉五世孫成,大統十二年,遣使獻其方物。成死,子湯立。


이후 효민제를 살해한 우문호는 우문태의 서장자인 우문육(宇文毓)을 황제로 계승하게 하였다.* 우문육은 후에 명제(明帝)로 시호를 부르기 때문에 본 단락에서도 명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 『주서(周書)』, 卷四,「帝紀」, 第四, <明帝> [본문] 武成元年 秋八月己亥,改天王稱皇帝,追尊文王為帝,大赦改元.


 * 명제(明帝)의 아명은 통만돌(統萬突)로 불린다. 이것은 534년, 우문태가 하주의 통만성에 머물었을 때에 출생 했던 것에 유래한다.


명제 역시, 우문호의 권력에 눌리며 당시의 모든 정사는 우문호의 손에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명제는 매우 명민해 식견도 갖추었지만 우문호의 입장에서 보면 명제의 명민함은 오히려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문호는 명제를 독살하고 우문옹(宇文邕)을 황제로 옹립했다. 여기에서 우문옹의 시호가 무제(武帝)이기 때문에 본 단락에서는 무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우문호는 초대 효민제부터 3대 무제까지 세우며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이것은 우문태가 죽으면서 우문호에게 황위 계승에 대한 부분과 황제를 보필하는 것을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수서(隋書)』, 卷 五十,「宇文慶列傳」, 第十五. [본문] 元孝矩......河南洛阳人也其后周太祖为兄子晋公护娶孝矩妹为妻......


『주서(周書)』, 卷 二十三,「宇文護列傳」上, 第十五. [본문] 子威嗣。威少有父风,袭爵美阳伯。娶晋公护女新兴公主,拜车骑大将军......


『주서(周書)』, 卷 三十五,「宇文護列傳」下, 第 二十七. [본문] 崔猷字宣猷,博陵安平人......猷深为晋公护所重,护乃养猷第三女为己女,封富平公主。)


우문호는 경쟁국가인 북제를 정복하기 위해 돌궐과 연합하여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문호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제(武帝)가 우문호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572년 출정하는 우문호의 세력을 축출하고 돌궐의 배신으로 돌아오는 우문호 마저 주살했다. 이렇게 우문호와 그의 세력을 축출한 무제는 친정을 개시하고 거대한 권력, 재산, 토지를 소유한 도교와 불교를 탄압해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일반 승려와 도사를 병사로 강제 징병하며 종교에 폐단을 단속하려 하였다. 당시 도교와 불교는 부패함으로 인해 많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부분을 단속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했다.


첫 번째로는 왕권이 우문호로 인하여 많이 추락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정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부분이 왕권 강화로써 모든 것은 황제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부분은 기존 북위에서부터 이어오던 한화정책에서 다시 선비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선비의 전통을 회귀하기 위해 왕조의 의례 등을 선비족풍으로 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용어도 한어가 아닌 선비어를 사용했으며 성씨도 원래의 선비족 성씨인 우문씨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행했다. 거기에 영내의 한인들에 대해서도 선비풍의 성씨로 고칠 것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유교, 불교, 도교를 모아 3교의 연구기관으로 통도관(通道關)을 설치해 우수한 승려나 도사를 학사로서 수용하여 폐불과 폐도를 단행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조건으로 정치제도와 군병제에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무제는 유교 경전에 있는『주례(周禮)』에 기초한 관제를 사용하고『주례(周禮)』를 이용하여 군병제에 변화를 모색했다.* 그리하여 대총재(大冢宰), 대사도(大司徒), 대종백(大宗伯), 대사마(大司馬), 대사구(大司寇), 대사공(大司空)의 6관의 관제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한 6관의 관제는 후에 3성 6부라고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 『주례(周禮)』에 따르면, 중국 주(周)나라의 통치조직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것은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동관(冬官)의 육관(六官)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대사구는 추관의 장관으로 형벌과 재판을 맡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외에도 천관의 장은 총재(冢宰)로 일반 행정을 총괄하고, 지관은 대사도(大司徒)의 책임 아래 민치(民治)와 교육을 담당하고, 춘관은 대종백(大宗伯)의 지휘 아래 예악・제사를 관장하고, 하관은 대사마(大司馬)가 장관으로 군사를 맡으며 동관은 대사공(大司空)이 토목을 관장하였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卷 三十九,「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30년, 5월 14일, 임자(任子) [본문] 又附論時事曰⋯是以明主用人 必先器使, 不然而使蚊負山, 使駒服箱, 則僨事敗政, 理所必至, 向來中批之擢, 或不量才, 若今之大司寇, 素有剛果之稱, 前後莅外, 頗得能聲, 而病在自用, 事不近情…


북주는 군의 요직으로 8주국 - 12대장군을 배치했는데, 이들 20명은 우문태의 출신지인 무천진(武川鎭) 출신자가 많았다. 이들 밑에 24개부를 설치해, 이들 24군단이 부병제 군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군사 제도는 수나라 양씨가 12대장군이었고 당나라 이씨가 8주국의 가문이었던 이유도 있어서 그대로 수나라, 당나라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북주의 불안한 정세를 들 수 있다. 외부적으로 북주는 돌궐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에 대한 조세 부담은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불교와 도교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각종 재물들을 징수하면서 착취의 폐악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대였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자칫 국가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내부적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다.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 재정을 충당하려면 종교에 대한 탄압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민심을 얻는 것과 동시에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두 가지의 포석을 가지고 있었다.


무제의 과감한 개혁으로 인해 북주는 무제 시기에 이르러서야 국가적인 형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면서 군사력이 강해져 575년에 마침내 북제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북주군은 청주(靑州)에 이르니 북제의 황제 후주 고위(高緯)가 진(陳)나라로 도주하려고 금 주머니를 안장 뒤에 놓으며, 장란, 숙비 등 십 수명과 더불어 말을 타고 청주 남쪽 등촌(登村)에 이르렀으나 북주 장수 위지강(魏志江)에게 발견되어 포로로 잡히고 재물들은 포획되었다. 그리고 북제의 도성인 업성을 함락시키고 입성했다. 여기서 태후와 함께 북제의 황족들을 사로잡은 뒤 유주(幼主)와 여러 왕들을 모두 장안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황제를 온국공(溫國公)에 책봉하였다.* 이로써 북제는 북주에게 578년 완전히 멸망했다.*


* 『북제서(北齊書)』, 卷八,「帝紀」, 第六 , <幼主> [본문] 隆化二年春正月己丑,周軍奄至青州,太上窘急,將遜於陳,置金囊於鞍後,與長鸞、淑妃等十數騎至青州南鄧村,為周將尉遲綱所獲。送鄴,周武帝與抗賓主禮,並太后、幼主、諸王俱送長安,封帝溫國公.


* 『북제서(北齊書)』, 卷 十二,「補列傳」, 第四 , <文宣四王> [본문] 高寶寧在營州,表上尊號,紹義遂卽皇帝位,稱武平元年。以趙穆為天水王。他缽聞寶寧得平州,亦招諸部,各舉兵南向,云共立范陽王作齊帝,為其報讐。周武帝 大集兵於雲陽,將親北伐,遇疾暴崩。紹義聞之,以為天贊己。盧昌斯據范陽,亦表迎紹義。俄而周將宇文神舉攻滅昌期。其日,紹義適至幽州,聞周總管出兵于外,欲乘虛取薊城,列天子旌旗,登燕昭王冢,乘高望遠,部分兵衆。神舉遣大將軍宇文恩將四千人馳救幽州,半為齊軍所殺。紹義聞范陽城陷,素服舉哀,迴軍入突厥。周人購之於他缽,又使賀若誼往說之。他缽猶不忍,遂偽與紹義獵於南境,使誼執之,流于蜀。紹義妃渤海封孝琬女,自突厥逃歸。紹義在蜀,遺妃書云:「夷狄無信,送吾於此。」竟死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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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의 시작점인 북위의 6진 중 하나 무천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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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에서 나타난 우문육 북주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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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 무제 우문옹의 초상화

 

 
 
TOTAL 170
86. 당나라 고조 이연, 태종 이세민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근거
이연 집안이 한족 조상을 가졌다 해도, 탁발선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 이후부터 선비어를 말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연이 당 나라를 세운 618년에는 이미 179년 가까이 선비어를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북주는 고사하고 한족 국가로 간주해도 된다고 흔히 말하는 북제 조정의 언어 역시 선비어였다. 그리고 북주가 한화정책을 거부하고 …
Name: 정길선  |  Date: 2017-06-02  |  Hit: 711
85. 당나라 고조 이연은 서량 황실 후손이자 선비족의 후예이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당국공(唐國公) 이병(李昞)의 자식으로 먼저 이연의 가계와 당나라를 건국한 과정, 그리고 이연의 선조들이 어떠한 인물들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나라가 선비족 계통의 국가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연의 7대조는 이고(李暠)*로 흉노 부족이 오늘날 감숙성 지역…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578
84. 수 문제의 탄생설화와 문제의 가계에 대하여
개국 황제의 출생에는 대부분 설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수나라 문제 양견 역시 탄생설화가 존재했고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갑자기 반야사의 정원이 양견이 출생할 무렵 보랏빛으로 밝게 빛났다. 비구니가 이르기를 "보통 아들이 아니니 소중하게 키워야 한다." 라고 말했다. 양견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양견의 이마에 용의 뿔…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407
83. 수나라 양견은 선비족 출신이고 수나라는 선비족 국가이다.
흔히 수, 당을 한족 국가라 하여 한족 국가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수, 당은 본연의 문화와 한족 문화를 입혀서 혼합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수, 당이 선비 본연의 색체를 점점 잃어가던 시기에 혈통적으로 선비의 혈통인 것은 수, 당의 시조들에만 해당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나라는 문제 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501
82. 북주 무제의 북제 정복과 수국공 양견의 등장
북주를 멸망시킨 이후 무제는 북제와 동맹국인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념했다.* 온달 장군이 등장하여 북주를 격퇴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고 577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평원태왕을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임명했다.* 577…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352
81. 북주와 고구려의 외교관계
북주와 고구려간의 외교적 부분의 대외관계에서는 고구려가 먼저 서위 시절인 546년에 외교 및 교역사절을 보냈다. 그리고는 서로간의 큰 교류가 없었다. 그것은 고구려는 원래 북제와 영토와 국경을 마주했기 때문이고, 동위와 북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고환이 고구려계이기 때문이다.* 북주가 세워진 이후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기…
Name: 정길선  |  Date: 2017-05-31  |  Hit: 389
80. 우문각의 북주와 우문호의 세도정치
북주는 우문각(宇文覺)에 의해 556년에 건국되었다. 북주의 건국과 우문선비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우문선비가 어떻게 서위의 영토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주목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문태의 출신지는 무천진(武川鎭)(貿泉鎭)으로 현재 내몽골자치구 지역으로 감숙성 이북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당 지역은 과거에 흉…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68
79. 북제 북주의 돌궐과의 관계를 표현한 왜곡된 서술
북주, 북제는 돌궐이 두려워 해마다 막대한 물자를 바치고 돌궐은 그들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막대한 물자를 받아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돌궐과 북주, 북제는 지배와 피지배자 관계인데 돌궐이 북주에 조공하였다고 『주서(周書)』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명제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명제 2년(558년) 사근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15
78. 강력한 돌궐에 북주와 북제가 무릎을 꿇다
유연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창 전성기를 누릴 무렵, 서쪽에는 유연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간 유연의 관심이 북위 시기 까지는 중원에 쏠려 있었고 중원에 있는 세력들은 유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과 중원 세력들 간의 알력다툼은 매번 유연의 패배로 끝이 났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34
77. 초기 거란과 고구려와의 관계
거란은 소수림왕 제위 시기인 378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8개 부락을 탈취했다.*이것 역시 거란이 생기고 나서 단독으로 이웃을 공격하여 거둔 거란사에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거란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종속국이 되고 말았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02
76. 우문선비와 그 갈래 민족들 (거란, 실위, 해, 습, 지두우, 고막해)와 …
우문선비는 고구려, 부여와 국경을 마주한 관계로 많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부분에서 모용선비가 고구려, 부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비공식적인 부분에서는 우문선비와 관계가 잦았으며 필요에 따라 이동하고 정주하는 부분이 더욱 강하였다. 여기에서 공식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정식국가와 같이 사신 왕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609
75. 우문선비의 요동, 요서 지역 정착과 모용선비와의 관계
우문선비는 강력한 세력을 일으키던 부족은 아니었으나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에는 주로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영위하였으며 주로 목축업을 하였다. 주로 목축업을 하던 지역은 오환의 옛 영토인 적봉과 서랍목륜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지역은 고구려, 부여와 주로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고 때로는 고구려의 보호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325
74. 탁발선비 연구에 대한 마무리와 탁발씨의 한족과 동화에 관하여
서위에 소속되어 있던 탁발선비의 일족은 북주가 건국된 이후 그대로 중원에 남았다. 우문선비가 건국한 북주는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오히려 전 왕조의 황족들인 탁발선비도 관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우문선비는 탁발선비의 과거 용맹성을 매우 높이 샀기 때문에 주로 무관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탁발선비의 황족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281
73. 탁발선비의 투르크계 변환과 중원 정착, 중앙아시아의 선비계 민족 …
동위와 서위가 멸망한 뒤 동위의 탁발선비 세력들은 북제의 시조 고양에 의해 북쪽 변경인 회삭진(懷朔鎭) · 무천진(武川鎭) · 무명진(撫冥鎭) · 유현진(柔玄鎭) · 옥야진(沃野鎭) · 회황진(懷荒鎭)에 강제 추방되었다. 북제의 고양은 이들 6개 진에게 탁발선비의 황족들과 남은 씨족들을 감시하게 하였는게 앞서 언급한 6개의 진들은 효…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622
72. 북제와 북주의 성립
550년, 후경(後景)이 남조 양(梁)나라에 항복해 동위를 배신하자 고양은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또한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고, 후경을 고립상태로 몰아넣었다. (『양서(梁書)』, 卷七十,「侯景傳」, 第七 [본문] 王僧辯遣侯瑱率軍追景。景至晉陵,劫太守徐永東奔吳郡…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383
71. 북위,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북제의 고씨 집안은 고구려의 후예이…
6진의 유력자 중에 고조의 일족들이 있었는데 6진의 난을 거쳐 북위의 멸망과정에서 고조의 일족 중에서 다시 권력중추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다. 회삭진 출신으로 동위(東魏)의 실권을 장악하여 북제의 기초를 닦았던 고환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유력자는 무천진(武川鎭) 군벌, 일명 관롱집단(關籠集團)으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486
70. 북위 영태후의 섭정과 6진의 난
선무제의 뒤를 이어 선무제의 차남인 효명제(孝明帝)가 황제가 되었으나 6세에 불과해 영태후(靈太后)가 섭정하게 되었다.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담당하면서 고조와 고조의 일족들을 일부 복권시켰고, 그들 고조의 일족들 중 고환(高歡)이 매우 영명하고 재능이 있어 발해 고씨 일족들은 다시 고환(高歡)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53
69. 고구려계 고조의 북위에 대한 철권통치와 그의 죽음과 몰락
선무제는 외가 인척들에게 매우 극진하여 외삼촌인 고조 형제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주고 외조부 고양(高陽)과 외조모에게도 작위를 추증하였다. 그리고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겼고 선무제는 정치보다는 오히려 향락에 심취하여 지냈다. 게다가 불교에 입도하여 점차적으로 불교신앙에 빠지면서 오히려 정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10
68. 북위, 백제와의 전쟁과 효문제, 문소황후의 죽음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대대적인 한족문화를 받아들이는 작업 시행했다. 이것은 풍태후도 하지 않았던 일로도 일찍이 풍태후의 섭정시기에도 이러한 제안이 들어온 적 있었으나 풍태후는 선비족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우려하여 실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효문제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위험한 일을 자행…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62
67. 북위 효문제, 백제와 전쟁에서 패배하다.
480년 고구려는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과 통교하기 위하여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북위의 광주(光州)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북위의 궁궐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남제와의 동맹에 대한 파기를 요구하여* 장수태왕은 북위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이를 파기하고 북위와 더욱 통교하게 되었다. 이것은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70
66. 북위 황실과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인
476년 고구려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북위와 통교(通交)하면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 중 고조(高肇)가 이와 같은 인물이었다. 고조(高肇)일가는 발해 고씨(撥海高氏)로 대대로 중원에 정착하여 살았던 완벽한 한족일가였다. 고조의 5세조인 고고(高苦)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 고고의 가문은 고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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