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아카데미_삼일학 연구원
삼일학연구원 최근게시글

춘천 중도 선사유적지
[이덕일 역사TV] 세계적인 고조선 유적지에 레고…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의 역사적 고찰] 3. 단…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의 역사적 고찰] 2. 고…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의 역사적 고찰] 1. 춘…
[반크] 레고랜드 플라스틱 장난감에 의해 어이…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포르투갈의 고인돌 문화 - 카스트로 문화(Castro c…
알타이의 텡그리를 바라보며...
투르크-타타르의 Умай (우마이) 여신에 대하여
페르가나의 지형
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개념
유범식의 천지자연의 법 조선철학
3. 혁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의 조선…
3. 혁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2. 뿌리없는 사상적 흐름을 경계하며
제5장 한국 사회운동 단편 - 1. 노동자운동의 기…
존엄어린 죽음 - 인신공양 / 평화의 땅에서 살육…
팔봉산의 하나민족 이야기
한국인의 하나복본 5
한국인의 하나복본 4
한국인의 하나복본 3
한국인의 하나복본 2
한국인의 하나복본 1
한길 백공종사의 배달학당
白空 한길 종사님의 천부경 강의(73)
한길 백공종사님의 천부경 강의(72)
한길 백공종사님의 천부경 강의(71)
천부경을 빛깔로...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
천부경을 빛깔로...析三極無盡本(석삼극 무진본
화니의 재미있는 桓세상이야기
[원효대사와 한桓철학 13]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원효대사와 한桓철학 12] 잘못됨을 알면서도 바…
[원효대사와 한桓철학 11] 무엇보다 홍익하는 자…
[원효대사와 한桓철학 10]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원효대사와 한桓철학 9] 애국애족은 쉽지 않다.…
김응렬의 생각없이 읽는 철학
[책속의 한 줄 - 3_4] 요가난다 자서전(기리 발라)
[책속의 한 줄 - 5_3] Conversations with God : book 3
[책속의 한 줄 - 5_2] Conversations with God : book 2
[책속의 한 줄 - 5_1] Conversations with God : book 1
[多夕日誌 공부 - 9] 張橫渠의 西銘
이강산의 통일을 위한 한민족 역사공부방
가섭원부여기 [복애거사 범장 찬] 시조 해부루
북부여기 [복애거사 범장 찬] 북부여기하 _ 5세 …
북부여기 [복애거사 범장 찬] 북부여기상 _ 3세 …
북부여기 [복애거사 범장 찬] 북부여기상 _ 시조…
단군세기(檀君世紀) 제46세 단군보을 / 제47세 단…
조홍근의 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조선(朝鮮) 제27대 두밀 …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조선(朝鮮) 제27대 두밀 …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조선(朝鮮) 제26대 추로 …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조선(朝鮮) 제25대 솔나 …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조선(朝鮮) 제25대 솔나 …
박현우의 가림토한글
한울(○).가를(十)
을미일 왕께서 아뢰시니
고한글 가릶톬
動動歌(동동가)
한 얼을 찾아서. [산해경 해내북경..氷夷(빙이)…
김용성의 태극한글 "신획"
[미치다]의 어원은 [밑+치다]입니다. (2)
마츄픽츄는 원주민 언어로 오래된 이라는 뜻
치우천황은 누구인가? 치우기록들!
시애틀에 대한 어원 고찰
우리말로 읽어야 뜻을 아는 영어
천부경, 삼일신고를 논하다
[참한역사신문] 마고천부경(麻姑天符經) 해독 …
[참한역사신문] 천부경의 내력
[참한역사신문] 묘향산 석벽본 천부경(天符經) …
[참한역사신문] 부도지와 천부…
[조홍근의 천부역사태학원] 하늘, 하늘님이란 - …
치화경治化經 인간366사
인간366사 제8훈 응함 _ 제6장 「응함」은 작음으…
인간366사 제8훈 응함 _ 제5장 「응함」은 큼으로…
인간366사 제8훈 응함 _ 제4장 「응함」은 가득함…
인간366사 제8훈 응함 _ 제3장 「응함」은 맑음으…
인간366사 제8훈 응함 _ 제2장 「응함」은 중히 …
성미경의 삼일사랑방
2022 배달문화원 애국가 - 독립군가
[KBS 다큐] 대장경에 담긴 '천년의 진리' -…
[배달문화원 개천이야기9-02] 3·1독립선언서(三…
[배달문화원 개천이야기9-01] 대한독립선언서(大…
[배달문화원 개천이야기 9] 대한독립선언서와 3…

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북제 북주의 돌궐과의 관계를 표현한 왜곡된 서술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30     조회 : 414  

북주, 북제는 돌궐이 두려워 해마다 막대한 물자를 바치고 돌궐은 그들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막대한 물자를 받아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돌궐과 북주, 북제는 지배와 피지배자 관계인데 돌궐이 북주에 조공하였다고 『주서(周書)』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명제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명제 2년(558년) 사근이 사신을 보내 와서 지방물건을 바쳤다.
ⓑ 보정원년(561년) 다시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그 지방 물건을 바쳤다.
ⓒ 천화 4년(569년) 사근이 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다.
ⓓ 건덕 2년(573년) 타발가한이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다.*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 明帝二年,俟斤遣使來獻方物. ⓑ 保定元年,又三輩遣使貢其方物. ⓒ 四年,俟斤又遣使獻馬. ⓓ 建德二年,他鉢遣使獻馬.)
ⓔ 명제 2년(558년) 12월 조 : 돌궐이 사신을 보내 지방물건을 바쳤다. (『주서(周書)』, 卷 四, 「帝紀」, 第 四, <明帝傳> [본문] 突厥遣使獻方物. )


돌궐과 북주, 북제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는 문장이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조공의 기록은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 소연(양 무제: 양나라 창업자)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돌궐이 사신을 보내 지방물건을 바쳤다.
ⓒ 진(陳)나라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였다. (ⓐ『위서(魏書)』卷 十四,「帝紀」, 第 十二, <孝静帝> [본문] 蕭衍遣使朝貢. ; ⓑ『주서(周書)』, 卷 四, 「帝紀」, 第 四, <明帝傳> [본문] 突厥遣使獻方物. ; ⓒ『주서(周書)』, 卷 六, 「帝紀」下, 第 六, <武帝傳> [본문] 陳遣使來聘. )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遣使朝貢)’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遣使獻方物)’는 조공이라고 주장하고 ‘사신을 보내 내빙하였다.(遣使來聘)’ 는 조공이 아닌 답방과 함께 교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양나라는 북위에 ‘조공’ 하였고 진(陳)나라는 북주에 ‘내빙’ 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차이점에 대하여 처음에 양나라와 진(陳)나라의 국력의 차이로 보았으나 진(陳)나라는 남조 국가 중에서 가장 약소국가였다. 그렇게 보면 조공과 내빙의 차이는 차이점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기록만 세 가지로 다르게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遣使朝貢, 遣使獻方物, 遣使來聘


이와 같이 돌궐과 북주, 북제는 지배와 피지배자 관계인데 반대로 돌궐이 북주에 조공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그러한 기록들이 위한휘치(爲漢諱恥)의 방식으로 서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주와 북제는 돌궐에 조공하는 관계였으며 확실하게 상하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면 된다.


577년 북제가 북주에게 멸망하자 돌궐은 북주에 대한 외교적인 정책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북제의 정주자사(定州刺史), 범양왕(范陽王) 고소의(高紹義)가 마읍(馬邑)에서 돌궐로 도망하였기 때문이다. 타발가한은 고소의를 북제의 황제로 세우고 인솔부대를 불러 모아 복수를 조장했다. 578년 4월 타발가한이 마침내 유주에 쳐들어와 주민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북주 유웅(劉雄)이 병사를 이끌고 항전하였으나 패배하여 전사했다. 무제(武帝)가 친히 총 6군을 거느리고, 북벌하려고 하였으나 때 마침 무제(武帝)가 죽어 이에 북벌계획을 철회했다.


같은 해 겨울 타발가한이 다시 변경을 침략하여 주천(酒泉)을 포위하여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579년 타발가한이 다시 화친을 청하였다. 그것은 북주에게서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는 국가전략으로 보인다. 그러자 선제(宣帝)가 조왕(趙王) 우문초(宇文招)의 딸을 천금공주(千金公主)로 책봉하여 시집보내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 고소의를 잡아 북주의 궁궐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타발가한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정주(幷州)를 침략하였다. 580년에 타발가한은 사신을 보내 패물을 주고 공주를 맞이하면서도 고소의는 여전히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선제(宣帝)가 또 하야의(下紹義)에게 가서 타발가한에게 다시 요청하자 비로소 고소의를 보냈다.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及齊滅,齊定州刺史、范陽王高紹義自馬邑奔之。他鉢立紹義為齊帝,召集所部,云為之復讐。宣政元年四月,他鉢遂入寇幽州,殺畧居民。柱國劉雄率兵拒戰,兵敗,死之。高祖親總六軍,將北伐,會帝崩,乃班師。是冬,他鉢復寇邊,圍酒泉,大掠而去。大象元年,他鉢復請和親。帝冊趙王招女為千金公主以嫁之,並遣執紹義送闕。他鉢不奉詔,仍寇幷州。大象二年,始遣使奉獻,且逆公主,而紹義尚留不遣。帝又令賀若誼往諭之,始送紹義云。)


마침 북주도 우문씨의 국가에서 양견(杨堅)이 세력을 잡아 국가의 정치적인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581년 양견(杨堅)이 북주의 마지막 황제인 정제(靜帝)에게서 황제 지위를 찬탈하여 수(隋)를 건국하였다.

북주와 돌궐의 관계는 위와 같은 서술들을 통하여 대등한 관계나 조공과 책봉의 관계가 아닌 돌궐에 대한 일방적인 주종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북주의 돌궐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치욕적인 부분을 많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돌궐이 수, 당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도 계속 중원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여태 돌궐과 북주와의 관계에 대한 선행연구는 한족화 되었던 우문선비에게 돌궐이 여러 차례 조공한 것을 요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돌궐이 북주의 국경지대를 유린하고 조새와 세폐를 바치고 있었다는 기록을 앞에 서술하였다. 이것은 한족들이 중원에 입장에서만 사서를 서술하려 하였던 오판에서 비롯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당시에 북주의 역사에 대하여 서술했던『주서(周書)』는 당나라의 영호덕분(令狐德棻) 등이 당 태종의 칙명에 의해서 저술한 기전체의 단대사이기 때문에 철저한 한족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주서(周書)』를 저술하면서 참고한 우홍(牛弘)이 저술한 책 등, 기타 위시한 여러 책은 서위, 북주 계열에 영향 받은 수나라 학자들의 손으로 된 저술이라 북주를 다룬 좋지 않은 기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따라서 영호덕분은 당나라의 신하인데 우홍의 곡필을 답습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북방민족에 대한 좋은 평가가 인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402638_1439807609411635_5512277040365787932_n.jpg

 

돌궐문자로 텡그리라 쓰여져 있는 글귀

 

18403082_1439807689411627_1304467938811937600_n.jpg

 

북주, 북제의 전쟁도

 

 
 
TOTAL 170
86. 당나라 고조 이연, 태종 이세민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근거
이연 집안이 한족 조상을 가졌다 해도, 탁발선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 이후부터 선비어를 말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연이 당 나라를 세운 618년에는 이미 179년 가까이 선비어를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북주는 고사하고 한족 국가로 간주해도 된다고 흔히 말하는 북제 조정의 언어 역시 선비어였다. 그리고 북주가 한화정책을 거부하고 …
Name: 정길선  |  Date: 2017-06-02  |  Hit: 711
85. 당나라 고조 이연은 서량 황실 후손이자 선비족의 후예이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당국공(唐國公) 이병(李昞)의 자식으로 먼저 이연의 가계와 당나라를 건국한 과정, 그리고 이연의 선조들이 어떠한 인물들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나라가 선비족 계통의 국가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연의 7대조는 이고(李暠)*로 흉노 부족이 오늘날 감숙성 지역…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578
84. 수 문제의 탄생설화와 문제의 가계에 대하여
개국 황제의 출생에는 대부분 설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수나라 문제 양견 역시 탄생설화가 존재했고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갑자기 반야사의 정원이 양견이 출생할 무렵 보랏빛으로 밝게 빛났다. 비구니가 이르기를 "보통 아들이 아니니 소중하게 키워야 한다." 라고 말했다. 양견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양견의 이마에 용의 뿔…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407
83. 수나라 양견은 선비족 출신이고 수나라는 선비족 국가이다.
흔히 수, 당을 한족 국가라 하여 한족 국가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수, 당은 본연의 문화와 한족 문화를 입혀서 혼합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수, 당이 선비 본연의 색체를 점점 잃어가던 시기에 혈통적으로 선비의 혈통인 것은 수, 당의 시조들에만 해당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나라는 문제 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501
82. 북주 무제의 북제 정복과 수국공 양견의 등장
북주를 멸망시킨 이후 무제는 북제와 동맹국인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념했다.* 온달 장군이 등장하여 북주를 격퇴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고 577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평원태왕을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임명했다.* 577…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352
81. 북주와 고구려의 외교관계
북주와 고구려간의 외교적 부분의 대외관계에서는 고구려가 먼저 서위 시절인 546년에 외교 및 교역사절을 보냈다. 그리고는 서로간의 큰 교류가 없었다. 그것은 고구려는 원래 북제와 영토와 국경을 마주했기 때문이고, 동위와 북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고환이 고구려계이기 때문이다.* 북주가 세워진 이후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기…
Name: 정길선  |  Date: 2017-05-31  |  Hit: 388
80. 우문각의 북주와 우문호의 세도정치
북주는 우문각(宇文覺)에 의해 556년에 건국되었다. 북주의 건국과 우문선비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우문선비가 어떻게 서위의 영토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주목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문태의 출신지는 무천진(武川鎭)(貿泉鎭)으로 현재 내몽골자치구 지역으로 감숙성 이북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당 지역은 과거에 흉…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68
79. 북제 북주의 돌궐과의 관계를 표현한 왜곡된 서술
북주, 북제는 돌궐이 두려워 해마다 막대한 물자를 바치고 돌궐은 그들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막대한 물자를 받아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돌궐과 북주, 북제는 지배와 피지배자 관계인데 돌궐이 북주에 조공하였다고 『주서(周書)』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명제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명제 2년(558년) 사근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15
78. 강력한 돌궐에 북주와 북제가 무릎을 꿇다
유연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창 전성기를 누릴 무렵, 서쪽에는 유연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간 유연의 관심이 북위 시기 까지는 중원에 쏠려 있었고 중원에 있는 세력들은 유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과 중원 세력들 간의 알력다툼은 매번 유연의 패배로 끝이 났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34
77. 초기 거란과 고구려와의 관계
거란은 소수림왕 제위 시기인 378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8개 부락을 탈취했다.*이것 역시 거란이 생기고 나서 단독으로 이웃을 공격하여 거둔 거란사에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거란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종속국이 되고 말았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02
76. 우문선비와 그 갈래 민족들 (거란, 실위, 해, 습, 지두우, 고막해)와 …
우문선비는 고구려, 부여와 국경을 마주한 관계로 많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부분에서 모용선비가 고구려, 부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비공식적인 부분에서는 우문선비와 관계가 잦았으며 필요에 따라 이동하고 정주하는 부분이 더욱 강하였다. 여기에서 공식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정식국가와 같이 사신 왕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609
75. 우문선비의 요동, 요서 지역 정착과 모용선비와의 관계
우문선비는 강력한 세력을 일으키던 부족은 아니었으나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에는 주로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영위하였으며 주로 목축업을 하였다. 주로 목축업을 하던 지역은 오환의 옛 영토인 적봉과 서랍목륜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지역은 고구려, 부여와 주로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고 때로는 고구려의 보호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325
74. 탁발선비 연구에 대한 마무리와 탁발씨의 한족과 동화에 관하여
서위에 소속되어 있던 탁발선비의 일족은 북주가 건국된 이후 그대로 중원에 남았다. 우문선비가 건국한 북주는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오히려 전 왕조의 황족들인 탁발선비도 관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우문선비는 탁발선비의 과거 용맹성을 매우 높이 샀기 때문에 주로 무관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탁발선비의 황족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281
73. 탁발선비의 투르크계 변환과 중원 정착, 중앙아시아의 선비계 민족 …
동위와 서위가 멸망한 뒤 동위의 탁발선비 세력들은 북제의 시조 고양에 의해 북쪽 변경인 회삭진(懷朔鎭) · 무천진(武川鎭) · 무명진(撫冥鎭) · 유현진(柔玄鎭) · 옥야진(沃野鎭) · 회황진(懷荒鎭)에 강제 추방되었다. 북제의 고양은 이들 6개 진에게 탁발선비의 황족들과 남은 씨족들을 감시하게 하였는게 앞서 언급한 6개의 진들은 효…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622
72. 북제와 북주의 성립
550년, 후경(後景)이 남조 양(梁)나라에 항복해 동위를 배신하자 고양은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또한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고, 후경을 고립상태로 몰아넣었다. (『양서(梁書)』, 卷七十,「侯景傳」, 第七 [본문] 王僧辯遣侯瑱率軍追景。景至晉陵,劫太守徐永東奔吳郡…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383
71. 북위,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북제의 고씨 집안은 고구려의 후예이…
6진의 유력자 중에 고조의 일족들이 있었는데 6진의 난을 거쳐 북위의 멸망과정에서 고조의 일족 중에서 다시 권력중추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다. 회삭진 출신으로 동위(東魏)의 실권을 장악하여 북제의 기초를 닦았던 고환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유력자는 무천진(武川鎭) 군벌, 일명 관롱집단(關籠集團)으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486
70. 북위 영태후의 섭정과 6진의 난
선무제의 뒤를 이어 선무제의 차남인 효명제(孝明帝)가 황제가 되었으나 6세에 불과해 영태후(靈太后)가 섭정하게 되었다.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담당하면서 고조와 고조의 일족들을 일부 복권시켰고, 그들 고조의 일족들 중 고환(高歡)이 매우 영명하고 재능이 있어 발해 고씨 일족들은 다시 고환(高歡)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53
69. 고구려계 고조의 북위에 대한 철권통치와 그의 죽음과 몰락
선무제는 외가 인척들에게 매우 극진하여 외삼촌인 고조 형제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주고 외조부 고양(高陽)과 외조모에게도 작위를 추증하였다. 그리고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겼고 선무제는 정치보다는 오히려 향락에 심취하여 지냈다. 게다가 불교에 입도하여 점차적으로 불교신앙에 빠지면서 오히려 정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10
68. 북위, 백제와의 전쟁과 효문제, 문소황후의 죽음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대대적인 한족문화를 받아들이는 작업 시행했다. 이것은 풍태후도 하지 않았던 일로도 일찍이 풍태후의 섭정시기에도 이러한 제안이 들어온 적 있었으나 풍태후는 선비족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우려하여 실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효문제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위험한 일을 자행…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62
67. 북위 효문제, 백제와 전쟁에서 패배하다.
480년 고구려는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과 통교하기 위하여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북위의 광주(光州)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북위의 궁궐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남제와의 동맹에 대한 파기를 요구하여* 장수태왕은 북위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이를 파기하고 북위와 더욱 통교하게 되었다. 이것은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70
66. 북위 황실과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인
476년 고구려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북위와 통교(通交)하면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 중 고조(高肇)가 이와 같은 인물이었다. 고조(高肇)일가는 발해 고씨(撥海高氏)로 대대로 중원에 정착하여 살았던 완벽한 한족일가였다. 고조의 5세조인 고고(高苦)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 고고의 가문은 고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91
1 2 3 4 5 6 7 8 9



- 맨위로 -